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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인디언 망하게 한 건 총보다 럼주

등록 2015-04-16 20:55

밀수꾼이 세운 브라운대학 교수
밀수 열쇳말로 미국 역사 재구성
이제 와 밀수와 전쟁 벌이는
미국의 이중성 폭로
밀수꾼의 나라 미국
피터 안드레아스 지음, 정태영 옮김
글항아리·2만8000원

<밀수꾼의 나라 미국>은 통념을 깨는 도발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미국 독립전쟁은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기보다는 밀수 단속에 격분한 무역업자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된 보스턴 차 사건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영국 정부에 대한 ‘조세 저항’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밀수 이익 때문이라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미국 식민지로의 차 수입 독점권을 확보한 영국 동인도회사는 시장을 선점했던 네덜란드 밀수품보다 싸게 차를 팔았다. 네덜란드 차 밀수에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면서 엄청난 이익을 챙기던 미국 무역업자들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보스턴 차 사건은 분노한 소비자가 아니라 부유한 밀수꾼이 일으켰다. 앉아서 쫄딱 망하게 생긴 사람들 말이다.”

이 시대를 풍미한 대표적인 밀수꾼이 존 브라운이다. 지은이가 교수(정치학과·왓슨국제문제연구소)로 일하고 있는 브라운대를 세운 사람이다. 밀수꾼들이 세관 단속선을 덮쳐 약탈하고 불을 지른 ‘가스피호 사건’의 주인공이다. 브라운만이 아니다. 미국 최초의 재벌 가문 존 제이컵 애스터는 “미국 최초의 억만장자 밀수꾼”이고, 보스턴의 존 핸콕 역시 밀수로 떼돈을 번 사람이다. 요컨대 ‘미국은 밀수꾼들이 세운 나라다’. 개발도상국 시절에는 흑인 노예뿐 아니라 영국의 방적 설비와 전문 기술자까지 밀수했고, 일손이 필요하자 엄청난 규모의 멕시코인들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도록 부추겼다.

밀수라는 관점에서 미국 역사를 보면 모든 게 새롭게 보인다. 할리우드 영화는 인디언들이 백인들의 총탄에 스러져 갔다고 묘사하지만, 실은 미국인들이 뿌린 럼주와 위스키에 먼저 무너졌다. “백인들은 주로 밀수한 술을 주고 모피를 얻으려고 인디언을 찾아갔다. (…)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불법적으로 공급하는 ‘사악한 물’에 자꾸만 의존하면서 총명한 기운을 잃고 결국 고향 땅에서 쫓겨나거나 심지어 부족 전체가 멸망하는 파국을 맞았다.” ‘미국 독립의 영웅’ 벤저민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야만인을 박멸해서 개척자에게 토지를 선사하는 것이 프로비던스(지금 로드아일랜드주의 주도) 당국의 계획인데, 럼주를 활용한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미 럼주는 연안 지역에 거주하던 인디언 여러 부족을 모조리 절멸시킨 바 있다”고 썼다.

영국이 미국 독립전쟁에서 진 이유는 “워싱턴 군대에 보급품을 실어 나른 화물선을 막지 못해 ‘밀수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고,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압도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4년이나 계속됐던 이유도 남군의 면화를 무기로 바꾸는 밀수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밀수라는 열쇳말로 미국 역사를 재해석하는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 믿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어서인 것 같다. “오늘날 국경을 무력화하고 합법적 경제활동을 저해(…)한다고 비난받는 밀수가 과거에는 미국의 탄생과 경제 발전, 영토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밀수로 일어선 미국이 지금은 전 세계를 상대로 ‘밀수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은이의 의도가 원래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이 책은 미국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보스턴 사람들이 세금 징수원을 붙잡아 고문하는 장면.
뜨거운 타르를 온몸에 붓고 깃털을 붙인 뒤 강제로 차
를 마시게 했다.(1774년, 브라운대학교 존 카터 브라운
도서관 소장) 글항아리 제공
보스턴 사람들이 세금 징수원을 붙잡아 고문하는 장면. 뜨거운 타르를 온몸에 붓고 깃털을 붙인 뒤 강제로 차 를 마시게 했다.(1774년, 브라운대학교 존 카터 브라운 도서관 소장) 글항아리 제공
오늘날 밀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마약이 대표적인 예다. 안데스 산맥 일대 코카인 산업이 소비하는 화학 원료의 상당량이 미국에서 수입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마약의 최대 수입국 역시 미국이다. “미국이 마약법 위반으로 감방에 집어넣은 범법자 수는 서유럽 전체 재소자보다 더 많다(2010년 현재 50만명).” 1950~60년대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프랑스 노동운동을 깨뜨리려 코르시카 폭력배들을 고용해 프랑스 공산당이 장악한 노동운동의 중심지 마르세유를 유린했다. 이들 폭력배들은 나중에 마르세유 부둣가를 장악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헤로인의 집산지로 만들어 버렸다. 1971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프렌치 커넥션’의 배경이다. 시아이에이의 주무대였던 니카라과,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던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이중성은 지식재산권에서도 잘 드러난다. 오늘날 미국은 중국의 해적질을 비난하지만 19세기 미국도 비슷했다. “19세기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 같은 사람이 자신의 책을 멋대로 복사해서 마구 뿌려댄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비난을 퍼부은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다. (…) 미국은 마크 트웨인 같은 자국의 작가가 똑같은 꼴을 당하고 나서야 저작권 보호를 위한 국제적 기준을 정하자고 우겨댔다. (…) 과거를 통해 미래를 짐작하자면, 중국은 어느 순간에 지식재산권 보호를 열렬히 부르짖는 나라가 될 것이다.”

책은 이밖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역사의 이면을 두루 들춘다. 미국인들이 ‘정직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링컨 대통령이 면화 밀거래 문제에 놀라울 정도로 관대했던 이유,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버지가 아편으로 큰돈을 번 밀수업자였던 점, 코카인이 처음엔 ‘코카’콜라, 포도주 등에 널리 쓰는 첨가물이었던 사실 등 흥미로운 일화들이 많다. 자국이기주의, 조직이기주의를 벗어던진 용기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한 책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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