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50주년을 맞아 열번째 시집을 내놓은 정현종 시
인. “너무 ‘나’에 갇혀 있어서는 좋은 시인이 되기 어렵
다. 큰 시인은 바깥과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이들이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정현종 시인 등단 50년 맞아
시집과 산문집 동시 출간
자전적 연작시 ‘몽로’ 구상도
시집과 산문집 동시 출간
자전적 연작시 ‘몽로’ 구상도
두터운 삶을 위하여
정현종 지음/문학과지성사·8000원, 1만3000원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올해로 등단 반세기를 맞은 정현종 시인이 시집과 산문집을 한꺼번에 내놓는 것으로 뜻깊은 해를 자축했다. 나란히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그림자에 불타다>는 그의 열번째 시집이고, <두터운 삶을 향하여>는 26년 만의 산문집이다. 지난 28일 오후 서울 서교동 문학과지성사 1층 카페에서 만난 시인은 “50년을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다”며 “내 나름으로 시를 써 왔고 그것을 독자들도 좋아해 주었다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모든 인사는 시이다./ 그것이/ 반갑고/ 정답고/ 맑은 것이라면.// 실은/ 시가/ 세상일들과/ 사물과/ 마음들에/ 인사를 건네는 것이라면/ 모든 시는 인사이다.// 인사 없이는/ 마음이 없고/ 뜻도 정다움도 없듯이/ 시 없이는/ 뜻하는 바/ 아무런 눈짓도 없고/ 맑은 진행도 없다./ 세상일들/ 꽃피지 않는다.”(‘인사’ 전문) 인용한 시는 시력(詩歷) 반세기에 이른 시인이 펼치는 ‘인사의 시’론이라 할 만하다. 이즈음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환대의 시’가 되겠다. 인사가 곧 시요 시가 곧 인사라는 통찰은 그의 널리 알려진 시 ‘방문객’을 떠오르게도 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로 시작하는 시 말이다.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일생의 무게와 더불어 찾아오는 방문객을 환대하는 일이 곧 시가 하는 일과 같다는 생각에는 시에 대한 겸손하지만 확고한 자부심이 들어 있다. 같은 생각이 산문집에서는 이렇게도 표현된다. “사실 시인이 이 세상에 왔다가 떠날 때까지 하는 일은 삶을 고양시키는 일일 것이다.” 시와 산문으로 충분히 피력한 생각을 인터뷰 자리에서 다시 물었다. 시란 무엇이고 시인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시인은 이번 시집에 들어 있는 시 ‘아, 시간’을 인용하며 답을 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태초이다./ 숨 쉴 때마다/ 태초가 숨 쉰다.”는 구절이다. “시인에게야말로 순간순간이 태초입니다. 시인이란 종족은 과거나 역사보다는 지금, 순간, 여기에 충실한 이들이에요. 세상은 과거의 노예가 되거나 역사의 중압에 눌려 있는데, 시는 그런 데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시와 예술 없이 삶을 어찌 견디겠어요?” “순간에서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협곡이 있고/ 산맥이 있다./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그림자들,/ 무거워, 한숨과도 같고/ 가벼워, 웃음과도 같은/ 그림자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그림자들”(‘그 사이에’ 전문) 삶이란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피고 지는 꽃과 같고, 인간은 꽃 따라 웃고 우는 그림자일 뿐이다. 허무하다기보다는 달관과 초탈의 태도가 만져진다. ‘순간의 미학’을 강조하는 시인이 시집의 처음과 마지막에 느림과 기다림의 시를 배치한 까닭을 짐작할 만하다. “이 느림은,/ ‘진짜’에 이르기 어려워/ 그건 정말 어려워/ 미루고 망설이는 모습인데/ 앎과 느낌과 표정이/ 얼마나 진짜인지에 민감할수록/ 더더욱 느려지는 이 느림은…”(‘이 느림은’ 전문) “기다린다, 익어 떨어질 때까지,/ 만사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될성부른가)/ 노래든 사귐이든,/ 무슨 작은 발성이라도/ 때가 올 때까지,/ (게으름 아닌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익어 떨어질 때까지’ 전문) 등단 반세기의 여유와 관조가 빚어낸 시들을 읽은 터에 새삼 ‘계획’과 ‘각오’를 묻기가 면구스러웠지만, 시인은 조심스럽게 구상 하나를 꺼내 보였다. “문학과지성사가 있는 이 건물 지하에 ‘몽로’(夢路)라는 레스토랑이 있지 않습니까? 그 간판을 보며 든 생각인데, 김현과의 인연 때문에 50년 동안 문지를 드나든 일이 어찌 보면 ‘꿈길’을 걸어온 것 같기도 해요. 그런 느낌을 가지고 그간 제가 걸어온 길을 ‘몽로’라는 연작으로 써 보면 어떨까 싶어요.”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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