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출신 작가 고종석(왼쪽)씨는 해박한 지식으로 번역의 역사를 논증하며 “원작의 표절을 잘 할수록 공식적으로는 좋은 번역이라 인정된다”며 “언어는 세계를 그리는 부정확한 그림이지만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의 ‘감염’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제공
고종석 작가 ‘번역대담’서 주장
“번역 때 형식·의미 함께 변해
번역 텍스트는 번역자의 것
번역, 문화 활성화에 굉장히 중요
다른 두 언어가 세계 입체적 재현
완전히 수평적인 언어 ‘감염’ 드물어
영어, 모든 언어 간섭하고 있어”
“번역 때 형식·의미 함께 변해
번역 텍스트는 번역자의 것
번역, 문화 활성화에 굉장히 중요
다른 두 언어가 세계 입체적 재현
완전히 수평적인 언어 ‘감염’ 드물어
영어, 모든 언어 간섭하고 있어”
“모든 번역은 오역이고, 원작의 표절입니다. 번역을 할 때는 형식과 함께 의미의 변화도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까 모든 번역은 의역이고, 직역이나 ‘완전 번역’은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번역 텍스트도 그래서 원작자가 아닌 번역자의 것입니다.”
원문을 얼마나 정확하게 한국어로 옮겼느냐를 두고 자주 논란이 벌어지는 시대, ‘모든 번역은 오역이며 표절’이라고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한 이는 언론인 출신 고종석 작가다. 지난 2일 오후 이화여대 국제교육관에서 연 ‘제2회 번역대담-번역을 묻다’라는 행사에서 그가 초대손님으로 나섰다.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비케이(BK)21플러스 번역전문인재양성사업단이 주최하고, ‘스타 번역가’인 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가 진행을 맡았다.
고 작가는 전문 번역가는 아니지만 최근 출판한 <언어의 무지개>(알마)를 비롯해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 등 여러 저서를 통해 문화와 언어를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혀왔다. 이날도 그는 ‘감염’이란 열쇠말로 서로 다른 언어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상을 재현하는 방식, 문화적 간섭 등에 대한 견해를 거침없이 펼쳐나갔다.
“번역이라는 건 문화 활성화의 굉장히 중요한 작업입니다. 번역은 한 세상에 또 한 세상을 들여놓아 세상을 입체화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중국이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에 노장사상을 많이 입혀 ‘격의불교’로서 중국식 번역을 했는데, 그것이 비록 원시 불교와 다를지라도 불교의 내용을 풍성하게 한 것이죠. 1980년대 일본에서 들어온 서구좌파이론서들의 번역도 일본어 ‘중역’인 데다 내용이나 문체로 보면 ‘쓰레기 같은 책’이지만, 한국어의 가능성을 실험해보는 일이기도 했죠.”
그는 최근작 <언어의 무지개>에서도 “감염된 인간이란 세계시민이라는 뜻”이라며 “우리 안의 타자들이 우리를 서로 닮게 한다”고 쓴 바 있다. 문화적인 접촉을 통해 언어는 서로 감염돼왔고, 지금 우리가 쓰는 언어는 고대 언어의 잔재와 현대 여러 나라의 문화가 두루 버무려진 결과로서 교양과 정체성까지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의 재현 문제에 대해서도 고 작가는 오랜 시간 설명했다. 언어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뜻 때문에 ‘언어결정론’으로 일컫는 ‘사피어-워프 가설’은 그럴듯하지만 원칙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그는 밝혔다. “‘착하다’와 ‘악하다’ 사이에 사실은 무한개의 단계가 있듯이 세계는 연속적이지만 이를 재현하는 언어는 불연속적”이라고도 말했다. “언어가 세상을 재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날 대담에는 언어의 위계나 권력의 문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정 교수가 “언어가 기본적으로 사용 집단의 사회적·문화적 힘과 연관이 있으니 ‘감염’에도 상하가 있고, 힘 센 쪽에서 약한 쪽을 일방적으로 감염시키는 경우가 있지 않나”라고 묻자 고 작가는 “완전히 수평적인 감염은 거의 없으며 지금은 영어가 세계의 모든 언어를 간섭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번 대담을 기획한 정 교수는 “번역이 불연속한 방식의 다른 두 언어가 만나 세계를 더 입체적으로 재현하고, 인간의 지평을 확대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밝혀주었다”며 “번역에 대한 그간의 논의를 새롭게 바라보는 기회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