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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미국 유학파, ‘트랜스내셔널 미들맨’의 이중성

등록 2015-05-14 20:55

미국에서 비주류·소수자였던 유학생
한국에서 주류·지배계급으로 거듭나
15년에 걸친 심층 종단 연구
미국 유학 지식인의 궤적 통해
지식권력의 글로벌 작동 해부
미국 유학의 본질은 ‘양다리성’
“미국 학위는 한·미의 지위 간극을
이용한 일종의 계급적 전략”
지배받는 지배자
김종영 지음/돌베개·1만6000원

소설가 이인화에게 이상문학상의 영예를 안겨준 소설 <시인의 별>(2000)은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 유학을 다녀오지 못한 국내파들이 출세도 못하고 얼마나 큰 설움을 겪는지 묘사한다. 지금의 미국 유학파와 국내파의 처지를 빗댄 것으로 보이는 이 설정은 역사를 공부한 독자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신라-당나라, 고려-원나라, 조선-명(청)나라, 망국시대-일본, 대한민국-미국으로 이어지는 피지배-지배의 역학관계 속에서 ‘제국’ 유학파들이 국내에서 차지하는 우월적 지위는 과연 면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은 그 1000년 역사의 비밀을 밝히려는 종단(오랜 세월에 걸친) 연구의 성과물이다. 1단계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 유학생 50명을 심층 면접한 데 이어, 2단계로 2011년부터 2014년까지 80명을 인터뷰했다. 이 중 1단계와 2단계 두번에 걸쳐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20명이었다.

김 교수는 미국 유학파를 ‘지배받는 지배자’ 또는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으로 규정한다. 지배받는 지배자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계층 이론에서 ‘지식인’을 일컫는 말인데, 문화 영역을 지배하는 지식인이 스스로 지배계급에 속하면서도 경제 영역을 지배하는 자본가의 지배를 받는 모순적인 집단이라는 뜻이다. ‘미들맨’이라는 개념은 ‘미들맨 소수자 이론’에서 따온 것인데,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중간에서 둘 사이의 경제 활동을 연결하며 이익을 보는 계층을 말한다. 중세 유럽의 유대인, 동남아시아의 중국인, 아프리카의 인도인, 미국의 한국인 등이 여기 속한다. 미들맨들은 지배계층에게 지배받으면서 피지배계층을 지배하는 모순적인 위치에 놓인다. “미들맨 소수자가 식민지적, 전근대적 상황에서 출현하듯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한국 학계의 지적 식민성과 전근대성 속에서 탄생한다 (…) 트랜스 미들맨 지식인의 주요 생존 전략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빨리 받아들여 한국의 로컬 지식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 트랜스내셔널리티(초국가성)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교육과 직업 기회 간의 연결, 변형, 초월을 의미한다. 미국 유학 지식인은 유학을 통해, 그리고 추후에 한국 또는 미국의 대학이나 기업에서 일하면서 정체성, 아비투스(취향 혹은 성향체계), 로컬리티의 변형과 ‘양다리성’을 경험한다.”

김 교수는 심층 면접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비주류이자 소수자, 피지배자일 수밖에 없었던 유학생들이 한국에 돌아와 지배자의 위치에 올라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미국 대학의 한인 남자 교수는 말한다. “(미국은) 살기 안 좋죠, 남자한테는. 거기서 가정적인 생활은 할 수 있지만 재미있는 삶이 없고. (…) 영어도 잘 안됐었고. 영어 안 되는 외국인이 거기서 사는 데 한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왕이면 좋아하는 한국에 가서 메이저로 살자, 왜 여기서 마이너로 사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교수는 첫 인터뷰 뒤 한국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기 분야에서 촉망받는 교수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주류 중의 주류가 됐다. 미국 박사 1호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이래 미국 박사 학위는 한국 사회에서 출세의 보증수표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 박사는 미국 박사를 알아보고, 서로 챙겨주며 네트워크를 이룩한다. “한국의 엘리트 계층에게 미국 학위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상징자본이 되고 있다. (…) 미국 학위는 한국 엘리트 집단의 배타적인 지위재이며, 이것이 없으면 (…) ‘이너 서클’에 들어가기 어렵고 배제되거나 소외되기 쉽다. (…) 즉 미국 학위는 한국 기업에서 엘리트와 비엘리트를 분할하는 상징적인 징표가 되고 있다.”

김 교수가 보기에 미국 유학의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과 미국 대학의 격차 때문이다. 막대한 재정과 장학제도, 연구시설과 장서, 연구 인맥, 교수들의 면학 분위기에 힘입어 미국 대학은 세계 대학 순위에서 상위 100위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에 반해 한국 대학은 짧은 역사와 열악한 재정, 첨단 연구 시설의 부족, 소규모 교수진, 학문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업무 체계, 젊고 유망한 학자를 부려먹는 조직문화 등으로 인해 후진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은 지식 생산 능력에서 큰 격차를 보이는데, 한국인 유학생들은 이 간극에서 트랜스내셔널 기회를 포착한다. (…)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는 한국 대학의 구조적, 조직적, 문화적 취약함으로 인해 더욱 공고해진다. (…) 미국 학위는 한국 대학과 미국 대학 간의 지위 간극을 이용한 일종의 계급적 전략이다.”

미국 유학생 수(2012~2013)는 한국이 7만627명으로 중국(23만5597명), 인도(9만6754명)에 이어 3위지만, 인구 비율로 따지면 단연 세계 1위다. 중국보다 7.8배, 인도보다 17.5배 많다. 미국 학위가 가장 잘 통하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얘기다. 이에 반해 일본의 미국 유학생 수는 1만9568명으로 한국에 견줘 턱도 없이 적다. 일본과 미국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얘기다.

스스로 미국 유학파인 김 교수는 왜 이런 책을 썼을까. “이 책의 목표 중 하나는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 학계와 대학에서 말이다. (…) 무엇보다 한국 대학과 학계의 천민성은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에 철저하게 종속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한국 지식인 집단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 민주화와 근대화를 거세게 요구해 왔지만 정작 본인들은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가장 모순된 집단을 이루고 있다.” 미국 의존도를 줄이려면 한국 대학의 개혁과 학계의 반성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그는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미국 대학의 수준은 형편없었고, 유럽으로 간 미국 유학생 수가 1만명에 이르렀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한때 “규모가 작고 수준이 낮은 모기떼”라는 비아냥의 대상이었던 미국이 “독수리”가 되었듯이, 한국의 대학도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고(물론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인내가 필요하지만) 지은이는 믿는다. 하지만 김 교수는 “학문의 제도적 담지자인 대학은 진리의 전담자일 뿐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등급을 분류하는 기계”라고 규정하면서도 그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미국에 쏠린 한국의 사회 체제와 그에 기생하는 지배계급의 재생산 구조에 대한 언급도 없다. 대중서와 학술서의 중간 지점에서 흥미로운 주제를 끈기 있게 추적해 흥미롭게 풀어냈다는 점에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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