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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 말본’ 한 짐 지고 38선 넘으면 명태가 한 달구지

등록 2015-05-14 21:58수정 2015-05-15 14:18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 서울 시민들이 서대문형무소에 몰려와 출옥하는 독립투사들을 맞이하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 서울 시민들이 서대문형무소에 몰려와 출옥하는 독립투사들을 맞이하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① 책의 해방과 분단 ; 1945-1950
식민지 청산과 민족으로의 ‘귀환’

소설가 박홍민은 단편 ‘벌쟁이’(<부인> 3호, 1946. 7)에서 해방된 한국 사회의 당면 과제와 그로 인해 벌어진 웃지 못할 상황을 인상깊게 묘사한다. 식민지 끝무렵 소학교 학생 정애는 일본말이 능숙하지 않아 급우들로부터 놀림을 받는다. 그녀가 조선어를 쓸 때마다 창씨한 가네야마(金山) 선생은 “빠가”라고 야단치며 뺨을 때린다. 그로 인해 정애는 ‘벌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해방 후 교코라는 여학생이 정애의 학교로 전학을 온다. 교코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조선인 ‘귀환 전재민’의 자식으로 조선어를 잘하지 못한다. 교코는 항상 혼자였고 정애는 그녀가 불쌍해서 친구가 되어 주려고 한다. 정애가 교코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 때마다, 이제는 이름을 원래의 성인 김씨로 바꾼 가네야마 선생이 “내가 일본말을 하지 말라고 했지”라며 다시 정애의 뺨을 때린다.

무수한 김 선생들에게 ‘8·15’는 일본적인 것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기호였다. 당대의 화두는 오염되지 않은 민족적인 것으로의 ‘귀환’이었다. 왜냐하면 해방 전 몇 년 간, 실제로 조선민족은 자기 말과 심지어 이름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가네야마에서 ‘본래’의 김씨로 ‘돌아오고’, ‘일본어’에서 ‘조선어’로 ‘귀환’함으로써 식민지는 청산되고 새로운 조선은 건설될 수 있다고 믿어졌다.

‘벌쟁이’의 희비극적인 삽화는 해방 직후 유년기를 겪었던 많은 문인들도 증언하는 것이다. 박완서는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국어 선생님이 그냥 우리말의 국어 선생님으로 눌러 앉아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비평가 유종호도 <나의 해방전후>에서 같은 교사의 입을 통해 어제까지 듣던 말과는 정반대의 말을 듣게 되었을 때의 충격, 국어라는 이름으로 일본말을 배우던 학교에서 국어라는 이름으로 조선어를 배우게 되었을 때의 충격을 증언한 바 있다.

해방된 조선인이 독립된 민족으로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통과제의를 거쳐야 했다. 한글과 한국사 교육은 그 핵심이었다. 각종 한글, 역사 강습회가 앞다퉈 열렸다. 한글과 역사 관련 출판물이 급증했다. 최남선의 <(신판)조선역사>는 초판 10만부가 몇 달 만에 매진되고, 1946년에 금융조합연합회에서 출간한 김성칠의 <조선역사>도 그 해에만 6만부가 판매되었다. 이병도의 <국사대관>, 장도빈의 <국사> <국사요령> <국사강의> <중학국사>와 남궁억의 <조선최근세사>, 권덕규의 <조선사> 등 한국사 관련 교재들이 날개돋친 듯 팔려 나갔다. <경제연감> 통계를 보면, 1945년 8종, 1946년 59종의 국사 관련 책이 간행되었다.

한글 관련서는 더욱 폭발적이었다. 출판사는 우선 ‘한글독본’류의 한글 공부책부터 출판했다. 독본류는 통계에도 잡히지 않았다. 이를테면 동아출판사는 최초 출판물로 경상북도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신생국어독본>을 간행했는데, <출판대감> 등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최현배의 <우리말본> 같은 한글서적은 해방 직후의 남한에서 쌀 한가마니와 맞바꾸기도 했으며, 북한에서 인기가 높아 이 책을 한 짐만 지고 북으로 가면 명태를 한 달구지나 가져올 수 있었다고 한다.

독립된 민족으로 거듭나기
한글과 한국사가 핵심이었다
김성칠 ‘조선역사’는 초판 10만부
몇달 만에 매진됐다
좌우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헌책방 매출 80~90%가 사상서적
38선이 굳어지면서
조선학은 한국학으로 표제를 갈았다

일본적 지식에서 민족·미국적 지식으로

광복 직후 외쳤던 ‘식민지와의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졌는가는 조금 더 따져볼 문제이다. 해방기는 현대 한국문화가 형성된 기원적 시공간이지만, 동시에 그 기원은 식민지에서 구성된 앎의 형식과 내용을 민족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가능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설립된 을유문화사가 1947년 3월 종로3가 12번지에 낸 직매서점 문장각의 당시 모습. 을유문화사 제공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설립된 을유문화사가 1947년 3월 종로3가 12번지에 낸 직매서점 문장각의 당시 모습. 을유문화사 제공
1950년 3월 <학풍>에 발표된 김성한의 단편 ‘김가성론’은 해방 직후 일본의 지식을 변용하여 자기화한 한국 지식사회를 풍자하는 소설이다. 주인공 김가성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의 서울대 교수로 암시되는 27살의 신진 학자이다. 김가성이 쓴 중학 화학교재를 읽은 한 중학생은 친구에게 “틀렸어, 왜말로 쓴 그 무슨 책이더라? 하여튼 무슨 화학연구야. 꼭 그대룬거 뭐, 사선 뭣해”라며 그 교재의 독창성을 부정하고, 김가성의 동창들인 신문기자들은 “흥, 해방 덕을 단단히 봤지. 무호동에 이작호(無虎洞狸作虎, 호랑이 없는 골에 이리가 행세한다)야”라며 그를 ‘새치기 학자’로 힐난한다.

중학생의 비아냥을 통해 비판되는 김가성의 표절, 즉 해방 이전 일본의 교육내용을 답습한 개설서와 번역서의 출간은 당대에는 흔한 현상이었다. 아직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낼 조건이 미비한 탈식민지 사회에서 비록 ‘일본 것을 답습한 것’일지라도 과거 지배자가 구사한 지식 위에 민족의 언어를 덧씌우는 과정은 그 자체로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만들어냈다. 일본인 교수의 공백을 전제로 한 ‘호랑이 없는 골에 이리가 행세한다’라는 표현에도 청산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권위의 원천인 제국의 지식(제도)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김가성의 학문적 전문성을 보증하는 것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이라는 이력과 제국대학과 연속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ㅅ대학 교수라는 권위이다.

서울대학교 설립은 식민지 제도의 변형 과정을 잘 보여준다. 1946년 7월, 경성제국대학을 인수한 경성대학과 서울과 근교에 있는 10개의 관립·사립전문학교를 통합하는 국립대학설립안(약칭-국대안)이 발표되었다. 국가가 설립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립대학을 세우는 것이 모순이며 그 과정도 비민주적이라는 격렬한 비판이 쏟아졌지만, 서울대학교의 설립은 인가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지식을 담당하던 일본 제국대학의 ‘법문학부’는 미국식 교양학부를 변용한 ‘문리과대학’이라는 새로운 제도로 바뀌었다.

근대적 학문을 대표한 두 축 중 하나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이 대거 월북한 상황에서 진단학회 및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문리과대학의 핵심을 장악했다. 제국의 지방학으로 수행되었던 ‘조선학’은 새로운 국민국가의 동질적 자아를 형성하는 규범적 지식인 ‘한국학’으로 변모했다. 정부수립 직전인 1948년 8월10일 서울대는 맥아더 장군에게 명예법학박사 학위 1호를, 곧이어 하지 중장에게 2호를 수여했다. 이것은 신생 서울대와 그것이 생산할 지식이 냉전의 세계지리 속에서 어떤 가치를 지향할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종합학술지 <학풍>.
종합학술지 <학풍>.
서울대 문리과대학이라는 학술제도와 출판자본 그리고 미국이라는 새로운 ‘보편’ 제국이 결합되어 창출된 지식장을 살필 수 있는 사례가 을유문화사의 종합학술지 <학풍>과 ‘조선문화총서’이다. <학풍>은 대한민국이 설립된 직후인 1948년 10월 창간되어 1950년 6월호까지 20개월 간 통권 13호가 간행되었다. 초기에는 사회주의적 지식인들도 글을 실었지만, 곧 그 주도세력이 서울대 문리과대학 소속 교수 일색으로 바뀌었다. 이후 민족주의 및 미국·서구의 지식이 중심을 이루며 사회주의적 지식은 타자화되었다. 을유문화사가 간행한 ‘조선문화총서’는 식민지 시기 제국의 지방학으로 구성된 조선학을 독립된 ‘한국학’으로 대중화한 기획물이다. 제1집 <조선민족설화의 연구>(손진태), 제2집 <조선문화사연구논고>(이상백), 제3집 <조선탑파연구>(고유섭), 제4집 <고려시대의 연구>(이병도) 등을 비롯하여 한국전쟁 직전까지 13집이 간행되었다.

좌우 대립과 문화의 분단

그렇지만, 해방 직후는 무엇보다도 ‘정치 사상 팸플릿의 시대’였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기자였던 박갑동은 여타 신문 발행부수가 몇만부 수준이었는데 <해방일보>는 60만부를 발행하느라 하루 종일 찍었다고 기억한다. 좌익서적 통계를 조사한 <조선해방연보>를 보면, 1946년 7월5일까지 202종 간행된 서적 중 좌익서적이 66종으로 32.7%를 차지했다. 고서점 매출의 80~90%를 ‘좌익 서적’이 차지했다는 신문기록도 있다.

김동인은 “외국 여행자로 조선 책방 점두만 들여다보고는 조선은 모국(소련 : 인용자)의 위성국이나 아닌가 하는 얼토당토않은 그릇된 단안을 내리게 된다”고 당시의 팸플릿 붐을 전한다. 언론인 송건호도 1946년 봄부터 좌익사상을 전하는 팸플릿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서 “46년 1년간은 이러한 이념 팸플릿이 서점을 가득히 메웠고 학생들은 이런 ‘팸플릿’을 읽고 사상청년으로 변해 갔다”고 기억한다. 소설가 서기원 역시 팸플릿 종류의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책, <공산당선언>, <공산주의 ABC>, 레닌의 연설집’ 등을 많이 본 사상서적으로 술회한다. 그 외에도 레닌이나 스탈린, 그리고 모택동의 저서와 유물론에 관한 번역서들이 집중적으로 출판되었다. 가히 ‘불온서적’들의 해방 시대라고 할 만하다.

이들 좌익 팸플릿은 황민화 교육만을 받았던 청년 세대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다. 해방은 조선인, 특히 청년들에게 정치에 대한 갈증을 풀어준 사건이었다. 그 정치 사상의 한 중심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1946년 7월 미군정 공보부의 대규모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85%가 ‘대의기구를 통한 모든 인민의 지배’가 바람직한 정부형태라고 응답하였으며, 70%가 좋아하는 사상으로 ‘사회주의’라고 답했다.(자본주의 13%, 공산주의 10%) 이 통계는 당시 한국인들이 좌익에 의해 주도된 ‘거리의 정치’와 사회주의적 국가 건설에 우호적이었음을 일러준다. 미군정이 진행되며 남한에서는 좌우익 갈등이 심화되었고, 점차 좌파의 정치활동에 금압이 이루어졌다. 1946년 대구 봉기, <해방일보> 정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남로당 불법화, 4·3과 여수 순천 사건,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남한 사회에서는 사상적 폐색이 심화되었으며, 좌익 서적은 금지되어 남한의 공식적인 출판계에서 점차 사라져 간다.

1948년 4월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 취재차 북한을 방문했던 기자 김석동이 남긴 취재기 ‘북조선의 인상’은 남북한이 분단되어 각각의 독자적인 공동체로 변모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보행자가 우측통행을 엄수하는 평양 거리에서 좌측통행에 익숙한 남한 방문단과 평양시민이 자꾸 어깨를 부딪혀 교통경찰에게 주의를 받는 장면을 보고한다. 이것은 38선을 경계로 분단된 남북한에 서로 다른 규율체제가 형성되었음을 일러준다. 또한 김석동은 책가게에서 소련의 출판물인 <고요한 돈> <레닌 선집> 등을 발견했지만 “북조선 돈이 없어서” 살 수 없었다고 아쉬워한다. 이제 남북한은 38선을 경계로 각각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하는 다른 국가로 재편되었으며 지식문화 역시 분단되었다.

정종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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