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포로:
송관호 6·25전쟁 수기
송관호 지음, 김종운 정리/눈빛·1만3000원
이 이야기는 어느 전쟁 용사의 무용담이 아니다. 치열했던 전투 장면이나 빛나는 승전보 또한 찾아볼 수 없다. 그저 21살짜리 청년이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로 끌려가 겪은 이야기를 담담하고 정직하게 정리한 것이다.
<전쟁포로: 송관호 6·25전쟁 수기>는 인민군 출신으로 전쟁포로가 되었던 실향민 송관호(86)씨의 체험기다. 21살 때부터 30살이 되던 해까지 9년 동안 전쟁 중심으로 쓴 수기를 엮었다.
1929년 지금의 북한 지역인 강원도 이천군에서 태어난 지은이는 1950년 9월18일, 부엌에 있는 어머니에게 “잠시 면에 다녀올게요”라고 말한 뒤 영영 집을 떠난다. 특별한 일 없이 동네 청년들과 면 인민위원회 앞에 모여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민군에 징집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행군을 하던 그는 “한 청년이 실신한 것처럼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걷는 모습을 보았다. “유심히 바라보니 그는 결코 정신이상이 아니라 마음속의 고통을 부르짖는 것처럼 보였다.” 인민군 가운데는 책가방만 달랑 들고 끌려온 10대~20대 초반 젊은이들이 수두룩했다. 인민군에게 잡히면 인민군, 국군에게 잡히면 국군이 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무거운 짐 때문에 낙오돼 곧 탈영을 결심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신작로엔 인민군 시체들이 즐비했고 학살당한 시체 사이로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한데 엉켜 생지옥을 이뤘다. 함께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는 치안대에 붙잡혀 죽고, 누구는 살았다. 길에서 마주친 마을 주민들은 부역자를 두고 “죽여라” “살려주자”며 말 한마디로 생사를 갈랐다.
북으로의 귀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설전을 벌이고 있는 북한측 대표.(판문점·1954. 2. 16) 눈빛 제공
지은이 또한 국군에게 “가짜 귀순자”로 오인돼 심문받고, 죽지 않을 만큼 매타작을 당했다. 물론 따뜻한 일이 없지 않았다. 도망중에 민가를 찾으면 사람들은 늘 기꺼이 잠자리와 거친 밥을 내주었다. 노동당원 아버지가 도망가고 치안대원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던 한 젊은 여성은 어려운 처지에도 남몰래 그의 상처를 돌보며 치료해주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고향에 가면 처녀한테 신세진 것을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꼭 다시 만나러 와야지” 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고향을 코앞에 두고 미군한테 잡혀 포로가 된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지은이는 좌우익이 갈라져 벌이는 또 하나의 전투 속에 놓이게 됐다. 극심한 사상 싸움으로 천막 안에서 하룻밤에 수십명씩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갔고, 미군은 방관했다. 돌림병도 극심했다. “나는 내 옆에서 이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간 사람을 여럿이나 보았다.”
1952년, 그는 반공포로를 모은 광주 수용소로 이송된다. 거제도 시절부터 함께 지냈던 ‘김 집사’는 한국이 미소 양국의 희생물로 전쟁을 치르게 되었으며 분단이 영속화될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이에 지은이는 “서러웠다”고 회고한다. “정작 우리가 조국을 통일하려고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외국에게 나라를 제공하는 빌미를 준 꼴이었다. (…) 이 모든 것이 ‘외국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권력만을 생각한 이들로 인해 비롯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그린 태극기를 들고 살려달라 애걸하는 학생과 인민군.(평양·1951. 10. 21) 눈빛 제공
운명의 1953년 6월18일 0시, 누군가 달아나라며 잠을 깨웠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추진하던 정전협정에 반대하면서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단독 행동을 감행한 것이다. 빗발치는 미군의 총소리를 들으며 그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휴전 뒤 서울에서 어렵게 번 돈을 모두 털려 경찰서에 신고하러 갔다가 어이없이 다시 국군으로 징집되었기 때문이다. 최전방에서 만 2년10개월 동안 복무를 마치고 1956년 만기제대 했다. 받은 것은 고작 쌀 한 말뿐이었다.
지은이는 이 땅의 백성으로, 정확하게 전쟁의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왔다. 총 쏘는 전투는 용케 피했지만 그 때문에 아수라장의 목격자가 됐다. 특히 그가 진술하는 수용소의 참상은 구체적이다. 거제도 일터에서 미군과 동거하는 한국 여인을 보고 한국 군인이 욕을 하자 미군이 그를 대검으로 찔러 눕힌 일, 동료들이 악몽을 꾸는 잠자리 밑을 파보았더니 어린아이의 시체가 나왔던 일, 수용소에서 나눠주는 빨간 옷을 거부하며 1만2000여명 모두가 벌거벗고 지냈던 일, 그 뒤 좌우익이 나뉘어 싸움이 벌어졌던 일 등이다.
송관호씨는 미군 군속으로 근무하던 중 결혼하고 남한에 어렵게 정착해 1남5녀를 두었다. 그의 수기는 40년 전 두툼한 가계부에다 손글씨로 적은 것을 초등학교 교사인 사위 김종운씨가 읽기 좋게 정리해 책으로 선보이게 됐다. 김씨는 “전쟁 지도자의 회고록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간 한 개인의 기록”이라며 “사장시키기에는 아까운 소중한 역사라 출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인민군 포로들.(인천·1950. 10. 2) 사진 속 포로들의 앳된 모습이 눈에 띈다. 눈빛 제공
출판사나 사위 모두 책을 만들며 무엇보다 원문을 훼손하지 않으려 애썼다. 몇번을 되물어도 증언이 일치했고, 손으로 쓴 수기 자체가 워낙 담백하고 솔직했다는 것이다. 출판사 눈빛 이규상 대표는 “기존 역사에서 누락된 사람들의 기록과 승리의 기록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진실과 가까운 것일까” 되물었다.
참상 가득한 전쟁을 묘사했지만 책에는 분노나 과장, 회한이나 위악이 없다. 그래서 더 실감나고, 안타깝고, 뼈아프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