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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동아시아 질서 향방에 중국 역할 컸다”

등록 2015-06-29 19:28

1951년 1월 붙잡힌 세명의 중국인 포로들. 사진은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해 지난 24일 공개한 6·25전쟁 관련 사진 가운데 한장이다. 연합뉴스
1951년 1월 붙잡힌 세명의 중국인 포로들. 사진은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해 지난 24일 공개한 6·25전쟁 관련 사진 가운데 한장이다. 연합뉴스
한국냉전학회 창립기념 학술대회
미소 중심 ‘냉전’ 개념에 이의 제기
한국전 참전 중국인 ‘친공포로’ 주목
거제수용소 ‘고초’뒤 본국서도 숙청
“냉전 구도가 낳은 구조적 폭력”
6·25 전쟁 당시 중국인 ‘친공포로’들이 수원, 부산, 거제도 등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상당수가 끔찍한 폭력을 겪었고, 본국에 송환된 뒤에도 고초를 당했다는 내용의 논문이 발표됐다. 또 동아시아 냉전 체제 구축에 중국의 역할이 생각보다 컸다는 지적도 나왔다. 임우경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인문한국(HK) 교수는 지난 25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한국냉전학회 창립 기념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흔들리는 분단의 사상지리’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6·25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친공포로’ 문제를 다뤘다. 냉전학회는 ‘냉전과 동아시아 분단체제’를 주제로 한 이번 학술대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임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당시 거제도 등지에 수용되었던 중국인민지원군 포로 생존자는 2만1000명이었다. 이 중 7094명이 ‘친공포로’로 분류돼 중국 본토로 보내졌고 포로의 64.5% 가량인 1만4200명은 ‘반공포로’로 대만으로 갔다. 나머지는 중립국을 원했다. 개인마다 어느 곳으로 갈 것인지 묻는 ‘송환 심사’를 거쳤기 때문에 겉으로는 자발적인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심각한 협박과 폭력이 자행됐다고 한다. 특히 ‘반공포로’가 우세했던 중국인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항아’ 같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문구의 문신 새기기가 강요됐고, 이념에 따르거나 고향이 있는 본토로 가겠다는 이들에 대해 “(반공)문신을 놔두고 가라”며 살을 도려내거나 심장을 파내고 인육을 먹는 등 포로수용소 사상 가장 잔인한 폭행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본토로 돌아간 ‘친공포로’들은 초기 우호적 분위기 속에 고국에 안착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후 엄격한 심사로 숙청을 당했다. 임 교수는 “귀국한 공산당원 91.8%가 당적을 박탈당하고 700여명이 군적을 박탈당했으며 문화대혁명 같은 격동기를 거치며 이들은 박해대상인 ‘의심분자’로 분류되었다”고 말했다. 이들에 대한 재조사와 복권 작업은 1980년에 들어서야 이뤄졌다. 반면, 대만행을 택했다가 1987년 대만 계엄해제와 함께 대륙친지방문을 했던 ‘반공포로’들은 고향에 돌아가 물질적 ‘보상’을 했고 ‘투자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임 교수는 “이들의 체험은 냉전 구도가 낳은 폭력성을 가리키는 ‘사상지리’라는 개념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사례로서, ‘사상-인신-영토’의 삼위일체를 강요한 구조적 폭력이었다”고 말했다. “동아시아의 냉전구축에서 중국의 역할과 중국인들의 역사적 체험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날 오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개념적 재구성과 냉전’을 발표한 이삼성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냉전’이란 개념 자체부터 이의를 제기했다. 미국 작가 조지 오웰이 처음 사용한 개념인 ‘냉전’은 미국과 소련 양극체제의 긴장을 뜻하는 말로 환원되는 탓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본질은 미소 냉전 자체가 아니라, 중국 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의 대분단 기축의 대립을 골격으로 하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성립한 데 있다”며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향방을 결정한 요인으로서 중국이 가진 역할과 의의를 충분히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전쟁과 전후질서 형성에 중국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신중국이 성립한 뒤인 1950년 1월부터 5월까지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삼자 사이에 한반도 전쟁을 위한 다자간 모의가 이뤄졌고 이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마오쩌둥의 대북한 지원약속이었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의 한반도 개입 약속이 한국전쟁 발발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한반도 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은 직접 격돌했고, 그것이 타이완 해협에 소분단을 구성했으며 인도차이나에서도 미국이 개입한 소분단체제가 형성되게 했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전쟁 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기축은 엄연히 “미일동맹 제일주의”였다며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기본은 일본과의 연합을 통한 중국대륙을 포함한 아태지역의 통제와 경영에 있었다고 분석했다. 동아시아의 긴장을 유발하는 일본의 보수적 역사인식 또한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염두에 둔 미국의 희망과 결부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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