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빌 레딩스는 대학이 이미 관료적인 기업이 되었으며 이를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하라고 한다. 사진은 지난 2010년 4월, 학교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중앙대생들이 서울 한강대교에서 고공시위를 하는 장면. 플래카드에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연합뉴스
‘근대 대학’ 냉철한 사망선고
풍부한 문화이론 돋보여
‘불일치의 공동체’ 대안 밝혀
풍부한 문화이론 돋보여
‘불일치의 공동체’ 대안 밝혀
새로운 대학의 탄생은 가능한가
빌 레딩스 지음, 윤지관·김영희 옮김
책과함께·2만2000원 나라 안팎의 지식인들이 ‘대학의 위기’를 진단할 때마다 자주 인용해, 그만큼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는 책이다. <폐허의 대학>(1996)은 대학의 기업화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탓으로 돌려 문제를 단순화하거나, 모든 해법을 학문적 자율성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대신 대학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복잡한 문화 이론까지 끌고들어와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다. 1990년대 중반, 캐나다 몬트리올대학 비교문학과 부교수로 일하며 문학과 문화이론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던 30대 학자 빌 레딩스는 대학의 사회적 역할이 변모한 원인으로 ‘수월성’(excellence)을 꼽는다. 그는 1993년 캐나다 시사 주간지 <매클린스>가 대학 순위를 매기며 ‘수월성의 척도’라는 특집을 실은 것을 보고 수월성이라는 개념이 “대학이 단지 기업체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바로 기업체라는 점”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수월성’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수월성은 학생 구성, 강좌 규모, 재정, 도서관 장서 규모, 심지어 학내 주차 같은 이질적인 범주를 단일한 저울 위에 올려놓고 계량화·수치화해서 “순위평가”를 매기는 “공통 통화”일 뿐이다. 언론의 대학 평가도 각 요소의 가중치가 자의적이고 양적 지표가 미심쩍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어떤 것이 좋은 교육인지 답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대학과 언론 모두 ‘수월성’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사실 거기에는 어떤 내용도 없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빌헬름 폰 훔볼트가 독일 대학에 적용해 완성한 ‘근대 대학’이 국민국가 기반 위에서 민족문화 이념을 생산·보호하고 주입하는 구실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지구화’가 급속히 진행되었고, ‘현금 관계’(돈으로 이뤄지는 비인간적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었다. 국민국가의 쇠퇴로 대학이 가진 (민족)문화적 사명도 소멸되었으며 대학의 모든 기능은 수월성으로 수렴했다는 것이다. 이제 근대 대학의 문제는 ‘비용 대비 가치’로 환원되었다. 고등교육은 소비재, 학생은 소비자로 변모했다. 자동차를 고를 때 때 연비 효율을 따지듯 고등교육 또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대학은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도 아니며 그저 ‘자율적인 관료적 기업’으로 전락했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대학에 들어가는 공적 재원이 축소되고, 대학을 투자처로 보는 초국적 기업들의 관심이 급증하면서 대학의 교육과 연구 기능은 행정 아래 포섭되었다. 특이한 점은 문화이론가인 지은이가 문화연구를 무척 냉소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문화 연구가 여성과 남성, 중심과 주변, 서구와 타자, 이성애와 동성애 등의 문제를 다루면서 ‘배제’를 지적하지만 “배제를 거부하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문화연구는 대학의 수월성 척도 덕에 대학에 재빠르게 뿌리내렸고, 심지어 기업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마케팅 기회를 제공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는 신생학문을 터부시하고 고전적인 인문학의 힘을 믿는 근본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대영제국의 토박이로서 나는 이미 인문학의 알맹이가 다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한 바 있으니, 인문학은 ‘여가’나 ‘교양있는 개인들’을 힘없이 되뇔 뿐 그 이상의 호소력 있는 어떤 이야기도 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전성기를 회고하기보다는 지은이는 ‘향수’를 산산이 부수는 쪽으로 논의를 밀고나간다. 68혁명 또한 특정한 대학 정의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그는 분석한다. 학생들의 봉기는 잃어버린 문화를 애도하며 보수화하거나, 신세계를 건설하자는 진보적인 근대주의를 끌어안을 수도 없는 “근대성의 시간적 곤경”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지구화 시대의 대학은 교양 또는 문화의 이념과도 무관하고 탈역사적이며, 수월성 같은 텅 빈 개념을 써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상태로 ‘탈지시화’되고 있다. 지은이는 책갈피마다 ‘대학’을 높고높은 경지인 ‘상아탑’이라고 규정해온 데 대한 비판으로 채워넣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폐허에서 거주하기를 촉구한다. 대학과 민족의 정체성 연계를 포기하고 대학에 민족주의의 ‘메타서사’가 없어졌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함께 사유하라는 것이다. 서로 소통은 안 될지 몰라도 그것으로나마 대학이 최소한 ‘불일치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빌 레딩스는 1994년, 34살의 젊은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이 책은 그의 사후 2년이 지난 뒤 출간되었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1979)이 유행할 즈음에 씌어진 책이라 국민국가의 해체를 일반화하는 데다, 국가 주도의 대학 구조조정과 인문학 위기가 한창 논란인 한국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성싶다. 그러나 대학과 문화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검토할 때 그 어떤 책보다 풍부한 공부거리를 줄 것으로 보인다. 옮긴이 윤지관 덕성여대 영문학과 교수는 현재 한국대학학회 회장으로 바쁜 일정 속에서도 책임감을 느껴 이 책을 옮겼다. 그는 “문화의 개념을 국가 이데올로기와 거의 동일시하는 관점에 대해서는 유보 또는 비판적이지만, 현장의 ‘교실’을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공역자인 김영희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와 ‘부부 학자’로서 함께 공부하며 옮겼다고 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