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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학과 신자유주의의 ‘요상한 만남’

등록 2015-07-16 19:50수정 2015-07-17 10:23

‘행복과학’은 인간의 감정을 돈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보는데,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은폐한다. 사진은 2014년 1월23일,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측정된 승려 마티외 리카르가 참가자들과 행복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 EPA 연합뉴스
‘행복과학’은 인간의 감정을 돈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보는데,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은폐한다. 사진은 2014년 1월23일,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측정된 승려 마티외 리카르가 참가자들과 행복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 EPA 연합뉴스
기업 등 사익집단이 주도하는 행복산업
구조 은폐하고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
우울증과 불안의 근원은 ‘권력 박탈’에
행복산업
윌리엄 데이비스 지음, 황성원 옮김
동녘·1만6800원

당신은 지금 역기를 들고 있다. 역기는 당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그 무게 때문에 당신은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역기의 무게를 줄여야 할까, 아니면 고통스럽다는 감정에서 벗어나야 할까? 또다른 상황을 가정해보자. 당신은 밥 먹듯 야근하고 죽을힘을 다해 일하지만, 내 집 한칸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경제적 구조의 문제일까, 아니면 당신이 무능해서 생긴 문제일까?

사찰의 구도자가 ‘행복 전도사’로 소비되고 ‘힐링’이 공공연한 상품이 된 시대, 바야흐로 행복은 인간이 좇아야 할 최고이자 최선의 가치가 됐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첨병인 세계경제포럼이 행복을 의제로 삼고, ‘최고 행복 경영자’를 채용하는 기업이 늘어나며, 사람의 감정 상태를 측정하는 스마트시계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 넘쳐난다. 어딘가 어색하다.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들이 왜 행복에 관심을 갖는 걸까.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는다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행복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일까.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지은이는 “화폐가 내면의 상태를 측정하는 마법의 출입구”가 되면서 이런 기형적인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 뿌리는 “자연은 인간이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를 받도록 했다”고 한 제러미 벤담이다. 그는 쾌락과 고통을 같은 잣대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보고, 그 측정 수단 가운데 하나가 화폐라고 주장했다. 또한 인간은 최소의 고통과 최대의 쾌락을 추구한다고 봤다.

오늘날 벤담의 후예들은 최첨단 기기를 동원해 촬영한 뇌의 형태,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얼굴에서 나타나는 표정만으로도 인간의 감정을 알 수 있으며 소통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014년 뇌와 뇌 사이의 텔레파시 소통에 성공한 실험은 대표적인 사례다. 말을 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전문가들이 알아서 예측해주는 사회를 예고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술을 국가 또는 정부와 같은 공익집단이 아니라, 기업과 같은 사익 집단이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슬픔을 우울증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미국 정신의학회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직후 나타나는 중대한 우울증 증세들’을 완화해준다는 웰부트린이라는 새로운 약물이 등장하자 이 원칙을 바꿨다. 제약 산업이 미국 정신의학회 예산의 절반을 대고 있고, 진단 기준을 자문하는 위원 11명 가운데 8명이 제약회사와 관련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설명하는 방식이, 제약회사의 금전적 이익에 영향을 받는 구조에 종속돼 있는 것이다.

행복과학과 신자유주의의 ‘잘못된 만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의 ‘작업장 행복 전도사’ 토니 셰이는 행복 의제에 시큰둥한 노동자 10%를 찾아내 해고하라고 기업 경영진에게 조언한다. 노동자가 행복해야 기업의 생산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노동자를 잘라내라는 것이다.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에서 노동자의 행복은 ‘활동과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더 많은 화폐를 생산할 자원’으로 인식된다. 행복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돈을 벌고 성공을 이루는 수단으로 그 가치가 전도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의 문제는 은폐되고, 노동자의 빈곤과 실패는 ‘개인의 실패’로 치부된다.

지은이는 마음을 혼자서 탈이 나는 “탈맥락화된 독립 개체”로 보고, 교정이 필요한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불행을 양산하는 문화의 한 증상이라고 지적한다. 우울증과 불안은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제도와 전략의 결과로 발생하는 ‘권력 박탈’ 때문에 빚어지는 것인데, 자본과 행복산업은 그 맥락을 지우고 현상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어 비판적 사고를 막고, 대안을 찾을 정치와 사회 진보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고통의 원인이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맥락 안에 있다면, 답은 분명하다. 당신은 역기의 무게를 줄여야 하고, 당신의 무능을 탓할 게 아니라 구조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비판의 날을 벼려야 한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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