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농촌계몽운동을 소재로 삼은 심훈 소설 <상록수>는 1960년대 남한과 북한에서 개발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영웅서사로 다시 태어났다. 사진은 신상옥이 감독하고 최은희·신영균·신성일·허장강 등이 출연했던 1961년 영화 <상록수>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⑦ 개발독재·민족주의 시대
굴욕적인 한-일 수교에 대한 비판 여론은 반일 역사소설 붐을 낳았다. 사진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61년 영화화돼 다시 주목받았다
일제에 저항을 그린 민족주의 소설이
개발주의 영웅서사로 재탄생한 것 이어령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와
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은
민족주의 관점인 점에서 비슷하다
굴욕적인 한일수교 또한
민족주의 역사소설 붐을 불렀다 대중이 ‘선데이서울’을 즐기는 새
‘사상계’는 탄압을 받아 쇠락하고
‘창작과비평’이 새롭게 선보였다 1967년 7월의 국내소설 분야 베스트셀러는 1위 <이광수전집>, 2위 박종화의 <임진왜란>, 3위 김성한의 <이성계>가 차지할 정도로 역사소설이 중심이었다. 삼중당이 간행한 이광수전집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1964년의 한 신문 광고는 “입학, 진학, 졸업하는 자녀에게 다시없는 선물”이라며 이광수전집 중에서도 <원효대사>와 <이순신> 등을 집중 홍보했다. 친일파 이광수는 <이순신>을 매개로 하여 납북된 공산주의의 피해자이자 민족주의자로 복권된다. 이순신이 구한 것은 이광수만은 아니었다. 이순신에 대한 박정희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한 것이어서 1966년에는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시작하고, 1968년에는 광화문에 장검을 찬 이순신 동상을 건립한다. 박정희는 한-일 수교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해 관제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멸사봉공의 아이콘 이순신 장군을 자신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려 했다. 이순신은 박정희의 친일 행적과 박정권의 매판성을 씻어주는 표백제였다. ■ 민족본질론과 내재적 발전론 60년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인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는 ‘풍토론’을 통해서 한국 문화의 고유성을 밝히려는 민족본질론의 사고를 보여준다. 그는 서로 다른 시대와 계급, 세대와 지역, 성차를 초월한 초역사적인 ‘한국(문화)’을 본질화한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어령은 시골 신작로에서 마주친 한 노인을 묘사한다. 가난하고 비참한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 보이는 노인은 민족의 대표단수로 호명된다. 여기서 작가가 미군 지프차에 올라탄 채 이 노인을 발견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한국인과 한국 문화의 고유한 본질을 이야기하지만 타자의 위치에서 바라보고 비교한다는 점에서 그의 인식은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짙다. 민족을 바라보는 이어령의 관점은 박정희의 시각과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개조되어야 할 한국인의 민족적 병리를 강조하고 다시 그것을 한국인이 겪어온 수난의 역정과 겹쳐 놓는다. 박정희는 비참하고 게으른 민족성을 바꾸어 근면한 생활인으로 갱생시키고, 이를 사회개혁으로 모아내어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들려 한다고 쿠데타를 정당화했다. 박정희가 강조하는 민족성론과 혁명론은 일본의 식민사관이 만든 타율성론 위에 개발주의를 덧씌워 놓은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중적으로 만연했던 민족성에 대한 비하가 극복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1960년대 후반 한국의 지식계는 식민사관의 정체성론/타율성론을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론을 개발한다. 김용섭은 <조선후기농업사연구>(1970)로 묶이게 되는 일련의 논문들에서 조선 후기에 있었던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근대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한 이러한 역사학의 성과는 국문학계의 사설시조, 판소리계 소설, 탈춤 등 서민문화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졌다. 정약용을 근대의 탐정처럼 다루고, 정조를 서구의 계몽군주처럼 묘사하는 현재의 대중서사물들은 내재적 발전론이 마련한 이러한 조선 후기의 역사상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른다. ■ ‘선데이서울’과 ‘창작과비평’ 1960년대 대중 미디어의 중요한 변화로 오락성 주간지의 성황을 꼽을 수 있다. <주간한국>(1964)의 대성공은 주간지 시대를 열어젖혔다. 일간지 최고 부수가 20만부에도 못 미칠 당시 <주간한국>은 43만5000부까지 발행되었다. 이러한 성공에 자극받아 1968년에만 <주간중앙>, <선데이서울>, <주간조선>, <주간경향> 등이 잇달아 창간되었다. 대중들이 많이 읽었던 <선데이서울>류의 주간지들은 ‘성’과 ‘부’에 대한 당대의 터질 듯한 생생한 욕망을 드러냈다. 저급성이 비판되지만, 이들 주간지는 그 비판자들의 내면에도 존재하는 비루함과 속된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오히려 시대의 솔직한 자화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종합교양지도 변화가 있었다. 박 정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 <사상계>는 중앙정보부의 탄압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였다. <사상계>를 이어 한국 지성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창작과비평>이 1966년 1월15일에 창간된 사실은 특히 기억해 둘 만하다. 통념과 달리 <창작과비평>은 창간 초에는 민중적·민족적 성격을 강조하지 않았다. 서구지향적 면모도 다소 보이던 이 잡지는 이후 염무웅의 활약과 신경림, 박현채 등이 참여하면서 권력과 자본에 대항하는 민중적/민족적 색깔을 갖게 된다. 창간 50년을 눈앞에 둔 <창작과비평>이 신경숙 표절사건과 관련하여 문학권력과 상업출판의 대명사로 지탄되는 오늘의 현실은 문자 그대로 격세지감을 자아낸다. 정종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인문한국(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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