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반일 민족주의는 극단적인 행태를 보여도 정서적인 지지를 얻곤 한다. 뜬금없이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정권은 반일 정서를 국내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면서도 일본 대중문화를 금지시키는 등 자기분열적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왜색 혐의로 검열하는 등 정권 차원에서 관제 반일 민족주의를 강화했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방향이 미국과 북한을 향할 때 사정은 달라진다. 이승만·박정희 정권은 반미와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민족주의를 용공으로 탄압했다. 조봉암과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의 처형, 동백림 사건 등에서 한국의 민중들이 배운 것은 냉전의 경계를 넘어서는 민족주의적 의식과 실천은 곧바로 고문과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남정현의 ‘분지’ 필화 사건은 1960년대 반미=용공이 결합하여 ‘주홍글씨’의 낙인이 찍히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분지’는 <현대문학> 65년 3월호에 실린 일종의 풍자소설이다. 작가는 홍길동의 10대손으로 설정된 주인공 홍만수가 양공주인 누이동생 분이를 학대하는 미군의 본처를 유인하여 그녀의 알몸을 보려다가 강간범으로 몰려 죽음을 기다리는 과정을 1인칭 독백체로 풀어내고 있다.
미군과 양공주, 군수물자의 밀매 등 소설은 전쟁 이후 한국 사회의 참상 및 매판성과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처음 발표되었을 때, 작품의 풍자와 반미적인 필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2개월 뒤 북한의 <통일전선> 5월8일치에 소설이 전재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남정현은 곧바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고, 소설이 이북의 누군가가 써서 건네준 것임을 실토하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분지’ 필화사건은 ‘반미=용공’이 되고, 북한에서 언급하기만 해도 곧바로 이적의 표지가 되는 사태를 보여준다. 이것이 박정희 시대에만 있었던 ‘옛일’에 불과할까?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 영화에서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시비가 일고, 5·18 기념식에서 제창이 불허되는 서글픈 해프닝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냉전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음을 보여준다.
정종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