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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1970년대 청년들의 필독서는 명대사 ‘경아~’를 낳고…

등록 2015-08-06 22:29수정 2015-10-22 15:16

197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은 남성 판타지를 자극하며 ‘호스티스 소설’의 유행을 불러왔다. 사진은 신성일과 안인숙이 주연한 이장호 감독 영화 <별들의 고향>(1974)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7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은 남성 판타지를 자극하며 ‘호스티스 소설’의 유행을 불러왔다. 사진은 신성일과 안인숙이 주연한 이장호 감독 영화 <별들의 고향>(1974)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⑦ 1970년대의 독서 개관
1970년대 초의 독서시장도 인구 증가와 경제성장에 발맞추어 빠른 성장의 과정에 있었다. 단기적인 부침은 교차하여 외판 중심의 유통체계가 한계에 봉착하고 출판사와 서점들이 망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론 계속 독자층이 두터워지고 규모도 훨씬 커지고 있어서, 베스트셀러 부수 기준 자체가 바뀌고 대형 서점도 등장했다. 1970년에 ‘전국민의 잡지’를 표방하고 창간된 <샘터>라든가, 1975년에 처음 출시된 삼중당문고, 1976년에 나온 잡지 <뿌리깊은 나무> 등이 상징하듯 출판은 더 대중화되고 더 새로워지고 있었다. 새롭게 자라나 교육받은 독자층을 위해 책들은 한글을 더 많이 쓰고 가로쓰기도 대폭 늘렸다.

■ 관변 독서운동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우민화정책을 폈다는 건 오해인 듯하다. 아무리 현대 독서사를 살펴봐도 우리가 책 안 읽는 국민이 될까 가장 노심초사하신 건 각하뿐인 듯하다. 즉 박정희 정권의 한손은 구금과 고문, 납치와 살해, 검열과 단속 등을 일삼느라 철권을 휘둘렀지만, 또 다른 한손은 마치 플라톤이 말한 철인통치(?)를 구현하려는 듯 관변의 문예와 학문을 ‘진흥’시키고, 인문학과 독서를 온 국민에게 장려했던 것이었다.(그런데 왜 그 딸이 결국 ‘책 안 읽는 국민’의 한 사람이 됐는지는 큰 의문이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예진흥’ 정책과 그 관련법률은 모두 1970년대 초에 시작된 것이다.

관변의 독서 장려 캠페인도 정말 활발했다. 문교부는 물론 문공부·내무부 같은 중앙 행정부처도 직접 독서운동에 나서거나 후원했다. ‘국민독서연맹’ ‘한국독서인구개발공사’와 ‘독서장려협회’ 같은 준관변 단체도 활발했다. 국민독서연맹은 육체노동으로 힘든 노동자들까지 배려하여 전국 각지에 ‘마을문고’와 ‘직장문고’를 설치했다. 예컨대 1971년 11월에는 서울 시내 모든 여자 차장들이 근무하는 94곳의 합숙소에, 1972년 2월에는 부산 시내 34곳의 여차장 합숙소에 직장문고를 설치했다. 조선작의 유명한 <영자의 전성시대>(1973) 등에 묘사돼 있듯 70년대의 여차장이란 가장 열악하고 힘든 환경에서 일하는 젊은 노동계급 여성의 상징이었다.

잡지 〈샘터〉, 〈뿌리깊은 나무〉
잡지 〈샘터〉, 〈뿌리깊은 나무〉
일반부·군인부·직장부·개인부 등 4개 부문에 걸쳐 실시된 1970년 ‘국민독서경진대회’의 예선 참가자만도 1만명이 넘었다. 자유교양협회는 전국의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자유교양대회(1968~75)를 열어 반강제로 동서고금의 인문학 고전을 읽게 했다. 이 협회는 미국 시카고대학의 자유주의 인문학 교육의 영향을 받은 단체인데, 자유교양대회는 지극히 한국적인 전국체전 방식의 ‘대통령기 쟁탈’로 열렸다. 일선 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은 고전을 암기하고 예상문제집을 만들어 풀었다. 이런 인문학과 독서 장려의 효과가 박정희식 근대화 동원체제를 강화했을까? 아니면 근저에서부터 점진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붕괴시켰을까?

■ 최인호와 그의 ‘청년’ 독자들

70년대 초에는 어떤 책이 많이 읽혔던가. 문학 쪽에서는 정연희·박계형·강신재 같은 여성 작가들, 남자는 고은·방영웅·김승옥·박목월·조지훈 등의 기성작가들이 인기가 있었다. 번역서로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이나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 등과 함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71년 수상작) 같은 노벨상 수상작도 매년 많이 팔렸다. 그리고 수백 종의 다른 판본으로 수백만 권이 찍히고 팔릴 (아마 미래에도 그럴지 모를) 얇은 책 한권이 이때 드디어 처음 번역돼 나왔다. 바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1945년생인 최인호는 고교 재학 중에 이미 문단에 나왔고 25살 이전에 이미 ‘술꾼’(1970), ‘모범동화’(1970), ‘타인의 방’(1971) 같은 뛰어난 작품을 발표해 문단의 기린아가 됐다. 마치 김승옥이 그랬던 것처럼, 등장하자마자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통블생’(통기타·청바지·생맥주)으로 요약되는 그 시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읽힌 것은 <별들의 고향>이다. 이는 ‘<자유부인> 이후’ 최대의 베스트셀러였다. 1973년 9월 상·하권 합해 초판 2만부를 찍었고 6개월 만에 8만부가 팔려 당시 국내 창작물로서는 ‘초유의 기록을 세우고 1974년에는 20만부를 돌파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사실 정확한 건 모른다. 보도마다 다르다. <별들의 고향>의 발행부수 자체가 새로운 현상이자 신기록이었고, 혼란이자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한손으로 철권통치
다른 편에서는 관변독서운동
전국에 마을문고, 직장문고 설치
초중고교에선 독서경진대회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최인호 ‘별들의 고향’
‘자유부인’ 이래 최대 베스트셀러
창비는 호스티스소설이라 뭉개고
대항마로 황석영 ‘객지’ 내세워

‘긴급조치 세대’ 저항문화 급속확산
한편에선 ‘저하늘에도 슬픔이’
또다른 한편 ‘난쏘공’이 펑 터져

한 인터뷰에서 최인호는 ‘젊음(은)’이라는 단어를 세 번 잇달아 사용하며 “젊음, 그리고 젊은 감정의 순수함을 꾸밈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젊은 독자들에게 파고드는 힘인 것 같”다고 했다. 그게 자기가 “특히 여대생에게 어필하는” 능력이라고도 했다. 그의 소설에서는 모두 청춘 남녀들이 등장하여, 당시 젊은이들의 (연애) 감정과 사회의식 그리고 생생한 입말을 그려보였다.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같은 대사 덕분에 엄청나게 유명해진 ‘경아’라는 여자 주인공은 남성 판타지가 투사된 존재였다. 경아는 키 155㎝, 가슴둘레 78㎝, 몸무게 44㎏의 가냘픈(그러나 왠지 개방적인?) 육체를 가진 순진하고 첫사랑 같은 존재로 묘사되었다. 젊은 남자 회사원들은 술집에서 ‘경아를 위하여’라면서 건배했고, 젊은 여성들도 ‘사랑꾼’ ‘경아’에 대해 어떤 동일시를 했다. 엄청난 화제 속에 영화 제작이 결정되자 자기가 경아 역을 맡겠다며 나선 여배우들도 줄을 섰다 한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은 남성 판타지를 자극하며 ‘호스티스 소설’의 유행을 불러왔다. 사진은 신성일과 안인숙이 주연한 이장호 감독 영화 <별들의 고향>(1974)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7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은 남성 판타지를 자극하며 ‘호스티스 소설’의 유행을 불러왔다. 사진은 신성일과 안인숙이 주연한 이장호 감독 영화 <별들의 고향>(1974)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최인호와 당시 문단의 관계도 흥미롭다. 애초에 문학과 지성(문지)과 창작과 비평(창비)은 뛰어난 문재를 가진 이 엘리트에 각각 호감이 컸다. 특히 문지와 김현은 창간호에 ‘술꾼’을 재수록하고 비평으로 최인호를 지원했다. 그러나 그의 상업적 대성공은 ‘순수·본격’을 지향한 문지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다. 일약 대스타가 된 최인호를 만난 김현은, 당신이 너무 대중적으로 성공하는 바람에 우리 입장이 곤란해졌다면서 계속 대중 소설가의 길로 갈 건지 따지듯 물었다 한다. 최인호는 당연히 반발했다. 그리고 창비도 먼저 최인호에게 투고를 요청했는데, 그가 투고한 ‘미개인’이라는 소설을 싣지 않고 뭉개다가 ‘사회의식이 약하게 표현됐다’며 ‘더 세게’ 수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한다. 최인호는 화가 나서 다시는 창비엔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한다. 문지와 창비가 패기만만하고 눈이 매우 높던 시절의 이런 에피소드는 70년대식 대중성과 ‘문지 대 창비’의 관계도 보여준다.

당시 비평가들은 <영자의 전성시대> <별들의 고향> 같은 소설에 나타난 여성의 육체와 섹슈얼리티가 근대화의 또다른 심각한 차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는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를 쉬 ‘호스티스 (대중)소설’이라 퉁치고 무시하려 했다. 창비와 문지는 각각 자기 길을 가며 독자층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그래서 창비는 1974년 4월 <객지>를 ‘창비신서’로 내면서 역시 새파란 20대였던 황석영을 자기네 스타로 만들려 했다. <객지>도 만만치 않은 판매 성적을 기록했다.

최인호 소설 ‘별들의 고향’
최인호 소설 ‘별들의 고향’

■ 청년문화와 독서

청년문화가 당대의 중요 이슈가 되면서 대학생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더 크게 사회적 존재감이 부각되었다. 한계에 달한 외판 전집류가 아닌 단행본 시장이 차츰 기대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대학생들이 많이 사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만큼 단행본 출판계의 대학생 의존도도 높아졌다. 그러나 아직 대학생들이 많이 보는 책은 이전과 확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어령·전혜린·김형석 같은 60년대식 에세이류와 헤르만 헤세·루이제 린저 등이 여전히 인기 있었다. 아직 본격적이고 저항적인 사회과학 도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1970년대 초중반의 대학생들은 최인호의 소설 또는 하길종·이장호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 <어제 내린 비> 등에 나타난 것처럼 기성의 권위에 짓눌려 있다. 열정이나 분노를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몰라 ‘위악’과 바보짓을 행하거나, 초점이 맞지 않는 반항을 한다. 그러나 유신 정권이 점점 광기를 더해감에 따라 ‘긴급조치 세대’들은 집합적 저항과 급진화의 시절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에서 민중주의와 저항문화가 빠르게 확산된다. 1974년 6월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 이화여대 서광선 교수는 당시 청년문화가 ‘별들의고향 형’과 ‘객지 형’으로 분화되어 가고 있다고 정리하기도 했다. ‘객지 형’은 저항적이고 민중적인 경향을 상징했다.

■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전태일을 거쳐 <난쏘공>에 이르기까지

한편에서는 개발독재의 강력한 억압과 경제성장의 성과가 부른 망탈리테(집단 심성)의 변화가 나타나 사회 전반에 속물화와 물신주의가 팽창해갔다. 그럼에도 어떻게 70년대 버전의 민중주의가 빠르게 확산되고 대학생·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저항의 동력이 마련되었을까?

압축근대화가 야기한 모순과 고통에 대한 공동체의 거부반응도 가시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 그리고 ‘가난’을 사고하는 양가적 시선을 통해 드러난다. 그 시대 한국 사람들은 점점 돈밖에 모르는 ‘경제적 인간’(호모 이코노미쿠스)이 돼 가면서도 다른 한편 ‘다 같이 가난하여’ 이웃을 연민할 수 있고 ‘우리 국민 모두’가 ‘가난 공동체’에 살고 있다는 공통감각 또는 착각을 아직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앵벌이’ 이윤복 소년의 일기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4)가 전국민의 눈물바람을 일으키고, 이후 불어닥친 출판계의 수기·논픽션 바람은 넝마주이, 고물장수, 구두닦이, 버스차장, 여공 등 가장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의 눈물 나는 이야기를 부각했다.

박광수 감독 영화 (1995) 중 전태일 역을 맡은 배우 홍경인의 분신 장면.    자료사진
박광수 감독 영화 (1995) 중 전태일 역을 맡은 배우 홍경인의 분신 장면. 자료사진
그리고 1970년 11월13일 스물두살 어린 재단사 전태일의 죽음. 사건은 그런 공동체적 연민을 한층 깊은 슬픔과 분노로 이끌었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서울의 주요 대학에서뿐 아니라 고등학교와 각지의 노동자들이 전태일 추모 집회를 열고 집단행동을 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에 이르면 더 놀랍다. 아빠 ‘난장이’는 비록 저항하지 못하고 자살해서 한 많은 인생을 마치지만, 평범한 주부인 신애는 ‘우리도 사실 난장이’라며 칼을 든다. 난장이의 아들딸도 복수를 다짐하고 결행에 나선다.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분신으로 떠오른 전태일 일기, 지하로 떠돌며 젊은이들 삶을 바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
등사판 형태로 손에 손으로
조영래가 뜨거운 문제로 정리

다 아는 얘기지만 전태일의 이름을 빼놓고 1970년대 초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 그의 죽음은 사회 전반을 충격하고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 같은 ‘치명적인’ 말을 남겼기에, 김문수·조영래·장기표처럼 ‘엘리트 코스’로 살아가던 사람들뿐 아니라, <전태일 평전>을 읽고 간접적으로 그 삶과 죽음을 목격한 무수한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과 감화를 주었다. 또한 자기 몸에 불을 댕기고 내달렸기에 많은 타인들의 죽음에도 영향을 주었다.

제도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지만 믿기 어려운 뛰어난 지성과 영성을 지닌 22살 청년 전태일은 공책 7권 분량의 일기를 남겼다. 일기 속에는 어린 전태일이 좀 비뚤배뚤한 글씨로 자기의 미래 꿈에 대해 쓴 것도 있고, 박정희를 ‘국부’로 칭하며 어린 노동자들의 피폐한 삶을 살펴봐달라고 호소한 (부치지 못한) 편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일기장에다 김소월의 시도 써놓고 한자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 일기는 전태일 사후 누군가들에 의해 옮겨 적힌 후 등사판 인쇄로 몇십부쯤이 돌아다녔다 한다. 대학생들 중에 이를 직접 본 사람들이 있었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은 당연히 이 일기를 기초로 써진 것이다. 일기 원본은 동생 전태삼이 보관했다가 2013년에 공개했다. 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기쓰기가 언제부터 초중등 교육의 주요 항목이 됐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일기쓰기는 제도교육이 하는 일 중에서 가치 있는 얼마 안 되는 일의 하나 같다. 어떤 식으로든 일기쓰기는 글쓰기와 자의식의 형성에 효능을 가지고 있다. 전태일에게도 일기쓰기는 그의 지성과 노동자로서의 자기의식을 키우는 데 단단히 한몫했던 것 같다.

뜨거운 문체로 쓰인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1983)은 한국 논픽션 문학의 고봉(高峯)이다. 이 책은 1980년대 중반까지는 복사본과 ‘지하문학’으로 유통되었지만, 그 뒤로부터 지금까지 수백만 부가 읽혔다. 그리고 ‘전태일’은 90년대엔 영화가 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십시일반 제작에 참여해서 만들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앞서 1978년에 일본에서 전태일과 그 어머니 이소선을 소재로 만든 <オモニ>(어머니)라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에 있던 반박정희-민주화운동 단체였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가 만든 이 리얼리즘 영화의 존재는 ‘전태일사’에 있어 묻혀버린 한 장면이다.

천정환 교수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기획 연재 5회(7월10일치)와 6회(7월24일치)가 각각 6회와 7회로 잘못 나갔습니다. 이번 연재가 7회이므로 이에 바로잡습니다. 혼선을 드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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