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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부적절한 ‘송수권 시문학상’ 제정

등록 2015-08-10 18:56

울림과 스밈
한국의 대표적인 시 전문 월간지 <현대시학>과 <현대시>가 8월호에 이례적으로 합동 성명서를 실었다. ‘‘송수권 시문학상’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을 단 이 성명은 전남 고흥군이 제정해 다음달 시행을 앞둔 제1회 고흥군 송수권 시문학상에 대한 ‘우려’를 담았다. 송수권 시문학상의 ‘개선’과 ‘거듭남’을 희망했는데, 상의 이름과 운영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고언으로 읽힌다.

두 잡지가 송수권 시문학상을 걱정하는 가장 큰 까닭은 송 시인이 생존 시인이라는 사실에 있다.

송수권(75) 시인은 고흥 태생으로 순천사범과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75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했다. 등단작이 잘 알려진 ‘산문(山門)에 기대어’다.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로 시작하는 서정적이며 리드미컬한 작품이다.

<현대시학>과 <현대시>는 살아 있는 시인의 이름을 건 문학상이 우리 시단에서는 금기와 같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시단에는 1950년대에 등단한 이들을 비롯해 송 시인보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오랜 원로 시인들이 여럿 있는바, 이번 문학상 제정은 “선배 및 동료 시인들에 대한 존중과 예의에 어긋난다”고 덧붙였다.

송수권 시인은 물론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통해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은 만큼 그의 이름을 단 문학상 제정이 아예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다. 편운 조병화(1921~2003) 시인 생전인 1991년부터 시상을 한 편운문학상 같은 선례도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이며 부적절한 사례라 보아야 한다. 고흥 지역 문인 모임 고흥문학회가 “적절치 않다”며 상의 철회를 요구하는 민원을 고흥군에 제기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송수권 시문학상의 문제는 더 있다. 고흥군이 조례 제정을 거쳐 밝힌 상의 시행 요강을 보면 기성 시인의 경우 시집 한권을, 신인은 시 10편을 ‘응모’하도록 되어 있다. 시인 자신이 응모할 수도 있고 다른 이가 ‘추천 응모’를 할 수도 있다. 상을 받고 싶으면 신청하라는 것이다. 두 잡지는 이런 선정 방식이 “시인들의 자존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고흥군은 또 송수권 시인의 시를 암송해 겨루는 시 낭송대회를 마련해 시상한다고 밝혔는데, 이 역시 “전례를 찾기 힘든 일로, 문학을 사유화하는 것”이라고 두 잡지는 비판했다.

송수권 시문학상은 대상 상금이 3천만원이고 우수상(2명)과 장려상(3명)을 포함한 상금 총액이 6500만원에 이른다. 시 낭송대회 상금도 대상 100만원을 비롯해 총액 680만원으로 결코 작지 않은 액수다. 여기에다 심사비와 시상식 등 운영비를 합하면 1억원 안팎 예산이 쓰일 것으로 보인다.

최재봉 선임기자
최재봉 선임기자
지자체들 사이에 자기 지역 출신 문인을 기리는 문학상 제정 바람이 분 것도 벌써 오래된 일이다. 다른 분야가 아닌 문학에 눈을 돌렸다는 것은 일단 고마운 노릇이지만, 문학상 난립 및 경쟁과 과열에 따른 부작용도 없지 않다. 문학적 성과가 의심스러운 이의 이름으로 상이 주어지거나, 반대로 수상자쪽 자격이 의심스러운 경우도 있다. 고흥군이 좋은 뜻으로 마련한 문학상이 출발부터 잡음과 시비에 휘말리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시단의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할 까닭은 없다고 본다. 그렇잖아도 최근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로 눈총을 받는 한국문학이 생존 시인 문학상 제정으로 또 한번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무엇보다 송수권 시인 자신의 지혜로운 판단이 요구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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