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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시인 허수경, 뮌스터를 걷다…독일 시인들과 함께

등록 2015-08-20 20:35수정 2015-08-21 10:32

독일 뮌스터의 우시장 자리에 있는 골목 쿠피어텔에는 본래 하층민들이 살았는데, 나치의 박해 등으로 다 흩어지고 지금은 주점과 레스토랑, 오래된 안경점, 미장원 같은 가게들이 빼곡하다. 허수경 제공
독일 뮌스터의 우시장 자리에 있는 골목 쿠피어텔에는 본래 하층민들이 살았는데, 나치의 박해 등으로 다 흩어지고 지금은 주점과 레스토랑, 오래된 안경점, 미장원 같은 가게들이 빼곡하다. 허수경 제공
허수경 시인 뮌스터 산책기
시내 곳곳 나치 흔적 밟고
고국과 모국어 그리움 달래
너 없이 걸었다
허수경 지음/난다·1만3800원

1992년 독일로 건너가 생애의 절반 가까이를 이국에 머물고 있는 허수경 시인이 고향과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보내 왔다. 새로 나온 그의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는 독일 북서부 소도시 뮌스터의 대학에서 고고학 박사학위를 받고 내처 그곳에서 살고 있는 시인이 뮌스터 시내 이곳저곳을 답사해서 쓴 책으로, 출판사 난다의 도시 산책 시리즈 ‘걸어본다’의 다섯 번째 권이다.

20대에 낸 두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와 <혼자 가는 먼 집>으로 한국 시단의 차세대 주역으로 떠오른 그의 갑작스런 독일행은 가까운 벗들뿐만 아니라 그의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도 큰 놀라움이었다. 고고학 공부를 하는 동안 뜸했던 글쓰기는 이후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같은 시집과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소설 <모래도시> <박하>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미국에서 순정한 모국어로 시를 타전해 보냈던 선배 시인 마종기와 비슷하게, 독일어의 바다에서 한국어라는 섬을 지키는 고독한 등대지기로 눌러앉은 듯하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 걸어다니는 이방인이었다. (…) 내 도시들은 비행기 거리로 열 시간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낯섦을 견뎌내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 걷다가 걷다가 마침내 익숙해질 때까지 살아낼 수밖에는 아무 도리가 없었다.”

낯선 곳에 떨어진 시인에게 걷는 일은 견디면서 익숙해지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 일을 그곳 시인들이 도와주었다. 10여개 장으로 나뉜 책에는 독일어권 시인들의 작품이 장마다 앞머리에 배치되어 이방 시인의 산책에 길라잡이 노릇을 한다. 1936년 나치 시대에 완성된 인공 호수 아(Aa) 호수 주변을 걸을 때 시인은 벼룩시장에서 산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1797~1848)의 시집을 지참한다. 그는 독일 문학에서 가장 많이 읽힌 소설이라는 <유대인의 너도밤나무>의 지은이이지만, 한국 시인이 눈을 주는 것은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를 향한 ‘불가능한 사랑’을 경험했고 그것을 시로 남겼다는 사실이다.

“아 호수를 바라보며, 이 시를 읽으며, 내 일생에 있었던 불가능한 사랑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 그리고 그 사랑의 순간에, 또한 사랑이 떠나가고 난 뒤에 저절로 솟아오르던 시들을 생각했다.”

뮌스터가 독일의 여러 도시 중에서 특별히 나치의 흔적이 짙은 도시는 아니지만, 시인의 산책은 어쩔 수 없이 나치가 남긴 상흔을 되밟는 걸음이 된다. 정신박약자라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거세된 파울 불프의 조각상, “여기에 살았다/ (이름)/ (생년)/ (몰년)/ (끌려간 장소)”가 새겨진 채 거리 곳곳에 박혀 나치 희생자를 기리는 10센티미터짜리 정방형 황동판 ‘걸림돌’들 그리고 칼갈이, 거지, 소매치기, 차력사, 고물상 같은 하층민들이 모여 살았으나 나치의 박해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 옛 우시장 골목 쿠피어텔 등이 두루 그러하다.

“독일에 와서 처음 그 자전거를 거리에서 보았을 때 나는 아, 내가 다른 나라에 있구나, 싶었다.”

시인이 말하는 것은 누워서 타는 자전거다. 도시를 둘러싼 옛 방어벽을 허물고 나무가 울창한 가로수길로 조성한 ‘푸른 반지’에서 그 자전거 탄 사람을 보면서 그는 동료 시인 진이정(1959~1993)의 유고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를 떠올린다. 진이정에 관한 언급은 나중에 한번 더 나온다. “내 벗이자 ‘21세기 전망’ 동인이기도 했던 시인 진이정의 죽음은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다.”

한편으로는 뮌스터 거리 곳곳에 새겨진 나치의 흔적을 곱씹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몇시간 거리에 두고 온 고국과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을 되새기면서, 시인은 이런 생각과 함께 산책을 마무리한다. “모든 살아온 장소들이 어쩌면 지나간 꿈이거나 다가올 꿈은 아닐까 싶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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