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의 시인 이선관은 <씨알의 소리>(1979년 9월호)에 실린 시 ‘번개식당을 아시나요’에서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그린다. ‘수출할 자유’가 흘러 넘치는 마산공단에서 정작 노동자들은 ‘밥 먹을 자유’가 없다. 정오만 되면 공단 후문에 순식간에 펼쳐지는 이동식 포장마차 번개식당에서 노동자들은 ‘일분 막국수’, ‘이분 짜장면’, ‘삼분 김밥’으로 허기를 달랜다. 그러나 번개식당은 ‘어느 할 일 없는’ 시민이 찍은 사진 한 장과 함께 지역 신문에 보도된 후 사라진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던 노동자들에게 책 읽을 시간은 있었을까? 1978년 <매일경제>의 조사는 월소득 5만원 미만 저소득층(노동자층)의 독서율이 뜻밖에 높은 것에 놀란다. 1980년 구로공단 노동자 327명을 표본으로 삼은 한 조사에 따르면, 여가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 ‘주로 독서를 한다’고 응답한 노동자는 전체의 39.4%였다. 독서 종류는 취미독서(30.3%), 전문서적 공부(20.5%), 문학작품 독서(20.2%) 순이었고 월간지, 주간지, 만화가 그 뒤를 잇는다. 책을 통 읽지 않는 요즘 세태와 비교해보면 당시 노동자들은 책읽기에 놀랄만한 열정을 쏟고 있었다.
■ 노동자의 책읽기
슬픈 이야기지만, 노동자들은 돈이 들지 않기 때문에 책을 읽었다. 1976년도 무렵 200만대가량의 티브이 수신기가 보급된다. 하지만, 저임금 노동자들은 그것을 살 여유도, 볼 여가도 없었다. 이에 비해 책은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정부와 관변에서는 동네마다 ‘(새)마을문고’를, 공장과 합숙소(기숙사)에 ‘직장문고’를 설치했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했던 도시산업선교회나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 등에서도 도서실을 마련하여 노동자들에게 책을 빌려줬다.
책읽기는 절박한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는 탈출구였다.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 석정남은 월간지 <대화>에 발표한 수기에서 책을 읽으며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신을 여타 노동자와는 달리 ‘교양’을 갖춘 인간으로 상상한다. 일기에서 확인되는 그가 읽은 책들은 <안네의 일기>, <주간중앙>에 게재된 소련 작가 솔제니친의 망명수기, 일본 번역소설 <원죄>, 국내 소설작품, 노벨상 수상작들, 셰익스피어 전집, 월간지 <한국문학> 등이었다.
책읽기를 통해 자기 삶과 상관없는 ‘교양’(?)을 추구하던 노동자들에게 어떤 도약의 순간이 도래한다. 그/그녀들은 노조의 소모임 활동과 파업을 계기로 ‘공돌이/공순이’에서 노동자라는 주체로 비약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이 과정에서 동료들과 함께 읽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 <어느 돌멩이의 외침> <어느 청년 노동자의 수기> <서울로 가는 길> 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기억한다. 이제 노동자들은 누군가 대변해줄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노동자의 삶에 대해 쓰고 읽었다. 전태일은 하나가 아니었다.
■ 산업화 비판의 교과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70년대는 급속한 경제 발전만큼 산업화의 그늘도 짙어지던 시대였다. 근대화로 인해 도태되는 한 서커스단의 해체 과정을 그린 한수산의 <부초>(1976)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맹목적인 산업화에 대한 비판의식과 무관치 않다. 이러한 산업화의 모순을 전면화한 작품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1978)이다. 가족의 마지막 식사도 허락지 않고 집을 부수는 무자비한 철거, ‘은강 노동 가족’의 참담한 실상과 난쟁이의 자살, 그들의 삶과 대비되는 재벌(자제)들의 퇴폐적인 삶의 면모 등 소설이 다룬 사회적 현실은 많은 독자들의 분노와 공감을 얻었다.
조세희는 <신동아> <대화> 등에 실린 사회문제를 다룬 논픽션의 당대적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대화 녹취록, 문서·통계와 같은 저널리즘의 서술방식을 작품에 활용했다. 예컨대 오늘날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등에 나오는 재벌의 이미지는 그 사례이다. ‘난장이’의 노동자 자식들과 얽히는 재벌가의 청소년들은 뭔가 대단히 조숙하고 퇴폐적인 인물로 그려지거니와, 이것은 재벌과 그 2세들을 반사회적 세력으로 고발한 당대 저널리즘 기사들과 관련된다. 가족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재벌 2세를 따라 나선 영희는 70년대적 논픽션 혹은 호스티스 문학의 한 맥락을 공유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난장이’ 가족이라는 우화적 설정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조세희는 어느 밤 오징어 장수인 난쟁이가 캄캄한 동네를 향해 “돈이 꼭 필요해서 반값에 오징어를 가져가라는데 이 ××놈들아 왜 안 사가느냐”며 넋두리를 하는 장면을 마주하고 주인공을 결정했다고 한다. 기자촌 너머 꼬방동네에 살고 있던 이 난쟁이의 한밤중 무력한 절규는 그만큼 작가에게 처연하게 다가왔나 보다. 조세희는 이 난쟁이의 처연한 절규를 문자로 작품에 새겨 둔 셈인데, 최근 재즈뮤지션 김오키는 재즈음악 <난쏘공>을 통해 책에 들어 있던 그 고통의 절규를 다시 음악으로 재생했다.
<난쏘공>은 출판 6개월 만에 10만부가 팔렸고, 100쇄(1996년 4월), 200쇄(2005년 11월)를 넘겨 100만부(2007년 9월)를 찍었다. 통상의 베스트셀러와 달리 이 소설은 대학가에서 먼저 붐을 일으켰다. 이 시기 많은 청춘들의 옆구리에 패션처럼 자리하고 있던 <별들의 고향> 대신 <난쏘공>이 갈아 끼워졌다. 대학생들은 이 책을 통해서 가난한 민중의 현실에 눈을 떴다. 당시에 구속된 학생 운동가들에 대한 판사 판결문에는 사건 당사자들의 의식화 커리큘럼의 첫 번째 목록으로 이 책의 이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소설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을 간절히 염원하는 조세희의 바람은 당분간 이루어지기 힘들어 보인다. 작품이 그렸던 70년대 난쟁이의 현실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일당 망루에서 철거민과 경찰이 불타 죽은 용산참사, 미군기지 확장에 따른 평택 대추리 주민의 수난 등 난쟁이의 자식들은 여전히 쫓겨 다니고 있다. 이러한 현실이 지속되는 한 조세희의 <난쏘공>은 스테디셀러라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할 듯하다.
밥먹을 자유가 없던 노동자들
“독서가 취미” 응답자가 40%
슬프게도 돈이 들지 않아서
절박한 현실 잊을 탈출구였다
무자비한 철거와 참담한 노동
그들의 현실을 대변한 난쏘공
노동자·학생 의식화의 교재로
아직까지도 베스트셀러 불명예
‘남한적 이념’의 가면을 벗긴
‘전환시대의 논리’도 마찬가지
언더서클 1학년 1학기 필독서
유시민 “인생의 교과서” 고백
유신 스피커 거부한 해직기자들
출판사 차려 이념서적 펴내
80년대 사회과학 읽기 붐 한몫
■ ‘임금은 알몸이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지식인 리영희가 1970년대에 출간한 <전환시대의 논리>(1974), <8억인과의 대화>(1977), <우상과 이성>(1977)은 모두 정부의 금서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를 안았다. 그만큼 그의 지식과 ‘루쉰’을 빼닮은 강직한 문장은 정권에 위협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전환시대의 논리>는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처음 베스트셀러가 된 책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의 <경향신문> 조사에 따르면, 이 책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태백산맥>과 더불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 저술이기도 하다.
70년대 중후반 학번과 80년대 초반 대학생들에게 이 책은 실로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유시민은 대학에 들어가서 만난 ‘지하대학’(언더서클)의 1학년 1학기 필독서가 <전환시대의 논리>였다면서 이 책이 지식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준 “인생의 교과서”였으며, 리영희가 철학적 개안의 경험을 안겨준 “사상의 은사”였다고 고백한다. 유시민뿐만 아니라 당시 운동에 투신한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은 의식의 각성제였다.
무엇이 그토록 강렬한 영향을 끼쳤던 것일까? 이 책은 중국문제와 베트남전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자극했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었다.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의 효과를 ‘남한적 이념(가치관과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진실을 위장했던 굳고 딱딱한 가면이 벗겨’지는 “‘가치의식’의 총체적 해체”였다고 요약했다. 그는 광적인 반공주의적 가치관과 극우적 세계관만을 듣고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인류사회에는 그것과 다른 인간적 사유와 존재양식으로 이루어진 사회와 국가들이 많다는 현실을 깨우쳐 주었다.
리영희는 ‘임금은 알몸이다’라는 소년적 폭로에서 그치지 않고 이러한 폭로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간적 타락과 사회적 암흑,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유신정권은 ‘임금의 알몸’을 바로 보게 한 그를 ‘의식화의 원흉’으로 지목했다. 그 결과 리영희는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다. 감옥에 있는 사이 그의 어머니가 돌아간다. 임종도 못한 그는 “들어온 밥과 사과 한알하고, 김지하가 보내준 사탕을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크게 빚진, 진정한 “사상의 은사”였다.
■ 언론인 해직과 사회과학 출판사의 형성
1970년대 중반까지의 <동아일보>는 실로 대단한 언론이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유신 정권의 스피커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주도했다. 정권은 <동아일보>의 광고줄을 옥죄는 방식으로 압력을 가했고, 시민들은 감동적인 격려 광고를 통해 언론자유를 후원했다. 하지만 <동아일보> 사주는 정권과 타협하고 113명의 기자들을 대량해고 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동아투위’의 성명처럼, “이제 동아는 어제의 동아가 아니다.”
해고된 ‘동아투위’ 구성원들은 자체 수입 확보를 위해서 책 출판에 착수했다. 해직기자들의 모임인 ‘종각번역실’에서는 휴머니즘적 사회주의 공동체를 제안하는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를 번역하여 3만여부를 판매했다고 한다. 이후 해직기자 중 일부는 출판사를 차리고 제적당한 학생운동권 후배들을 편집부 직원으로 채용했다. 한길사, 예조각, 과학과인간사, 정우사, 청람출판사, 두레, 아침 등의 출판사가 이렇게 태어났다. 정권은 대학과 언론계 등에서 교수와 기자, 학생들을 축출했지만, 출판계는 그들을 영입하여 새로운 ‘의식의 요새’를 구축했다. 이들 출판사들은 80년대 사회과학 붐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정종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인문한국(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