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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젠더, 고통, 진실이 경합하는 ‘KAL 858기 사건’

등록 2015-09-03 19:39

실종자 가족들은 생계부양자를 잃은 여성이 많았고, 폭파범 또한 여성이었다. 2003년 ‘칼기 폭파사건 16주기 추모식’에서 오열하는 실종자 가족의 모습.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실종자 가족들은 생계부양자를 잃은 여성이 많았고, 폭파범 또한 여성이었다. 2003년 ‘칼기 폭파사건 16주기 추모식’에서 오열하는 실종자 가족의 모습.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김현희-칼기 사건 10년 학술 탐사
63명 면접·5개국 비밀문서도 포함
‘이야기의 힘’ 강조한 국제관계학
슬픈 쌍둥이의 눈물
김현희-KAL 858기 사건과 국제관계학
박강성주 지음/한울아카데미·3만4000원

이것은 냉전과 안보 그리고 국제정치에 대한 거대하고 까다로운 이야기다. 다들 사건이 명백하게 밝혀졌다고 하지만 피해 당사자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 그러나 끝내 누군가 하고 또 들어야 하는 이야기다.

<슬픈 쌍둥이의 눈물>은 이른바 ‘칼기 폭파 사건’으로 일컫는 비극을 다룬 국제관계학 학술서다. 지은이 박강성주 네덜란드 레이던대(지역학연구소-아시아학대학) 교수는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 삼아 쓴 이 책을 지난해 영국 라우틀레지 출판사에서 영어로 출간했으며 최근 한국어판을 직접 수정·번역했다.

1987년 11월29일, 대한항공 858기는 탑승자 115명과 함께 안다만해에서 사라졌다. 12월15일, 대통령 선거 하루 전 ‘여성 테러리스트’가 바레인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23일, 그는 자신의 이름이 김현희이며 비행기를 폭파했고 북한 지도부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 지령을 내렸다고 자백한다. 1990년 3월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보름 뒤 사면되었다. 얼마 뒤 영화 <마유미>(영어제목 ‘마유미: 처녀 테러리스트’, 신상옥 감독)가 개봉됐다. 김현희는 수기를 펴냈고, 강연을 했고, 자신의 고통도 증언했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 전 안기부 직원과 결혼했다.

지은이는 2002년 통일부가 주최한 전국 대학생 통일논문 현상공모전에 논문을 응모해 입상했지만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쓴 부분을 수정해달라는 요구를 받았고, 거부했다. 입상은 취소되었다. 힘들었지만 연구를 이어가기로 하고 2004년부터 4년 동안 실종자 가족회와 사건 대책위원회가 마련한 거의 모든 모임과 활동에 참여했다. 한국,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스웨덴 정부에는 정보공개 청구를 했다. 총 63명을 면접했으며 그중 절반은 실종자 가족들이었다. 조갑제·주진우 등 관련 기사를 쓴 기자들, 재조사에 관여한 이들, 인권활동가, 전 정부 관리들을 만났다.

‘젠더-고통-진실’이라는 개념은 책의 뼈대를 이룬다. 폭파범은 ‘여성’이었고(젠더), 사건에는 여러 의문이 있으며(진실),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했다. 이 책은 ‘젠더화된 고통’을 다루면서도 왜 특정한 고통이 무시되고 특정한 설명만이 진실로 간주되는지 살핀다.

 1989년 첫 공판 당시 김현희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첫 공판 당시 김현희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용서해주세요, 미안해요”라고 했다는 김현희의 첫 자백은 “언니 미안해”로 드라마틱하게 변형돼 발표되었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1991)라는 수기 출판 작업에도 국가의 기획이 개입되었다고 지은이는 밝힌다. 국내외 언론이 ‘아름다운 처녀 테러리스트’라며 그의 미모를 화제로 다뤘다. 한 남성 기자는 인터뷰 첫 문장부터 “김현희는 역시 예뻤다”라고 썼다. 냉혹한 살인자라기보다 ‘북한 정권에 이용당한 희생양’으로 그는 변모해갔다. 지은이는 이런 여성성을 “젠더 폭탄”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사건과 관련된 (진실 문제를 포함한) 다른 복잡한 맥락과 이미지들을 ‘폭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맥락이 피해자들에게는 통증으로 다가온다. 책에서는 폭파범의 심적 고통을 배제하지도 않지만, 실종자 115명의 가족들이 느낀 고통이 상상 이상으로 끈질겼다는 부분을 확실히 드러낸다. 실종자 가족들은 “정확한 사실을 안 알려주니까” “억울하니까”라며 가슴을 쳤다. 이들의 이야기는 점점 뒤로 밀려났다. 승객 대부분은 중동 건설노동자들이었다. 가족들은 시신을 보지 못해 “죽은 것 같진 않아”라고 말한다. 공식 수사 결과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사건과 관련해 풀리지 않는 질문들도 제기되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결국 재조사 운동에 나섰다.

국가정보원 발전위원회(2005~2007년), 진실화해위(2007~2009)가 재조사를 시도했지만 두번 다 김현희를 만나지 못했다. 2007년 국정원 발전위원회는 공식 수사 발표가 맞지만 군사정권이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지은이는 “재조사 요구를 북쪽이 비행기를 폭파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해”라며 “가족들이 재조사를 바라는 이유는 공식 수사 결과가 확실하지 않고 물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국가의 ‘공식 서사’에 의문을 품는 이는 친북주의자, 안보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되기 쉬웠다.

지은이는 김현희의 ‘고백 서사’의 권위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밝힌다. 미국을 비롯한 5개 나라에 정보공개 청구를 한 결과를 종합하면, 조심스러운 질문들이 없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공식 수사 결과를 지지했던 미국 쪽은 올림픽 방해를 위한 첫 단계로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는 데 의문을 가졌다. “평양이 왜 이렇게 빨리 행동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영국, 호주도 비밀문서에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 진실화해위 재조사 관계자는 “물증이 있어야 뭐 어떻게. (…) 이 사건도 말만 남은 사건이 됐다”고 말했다. 지은이는 이에 “진실로 간주되는 김현희의 자백이 도전을 받아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책은 경합적 진실과 국제관계학의 감정적 영역을 다루기 위해 스토리텔링을 시도한다. 책에 실린 짤막한 소설은 실종자 가족의 고통과 감정, 김현희가 느낄 미안함, 연구자 개인의 경험을 담고 있다. 학술적 영역에서 ‘상상력’을 동원하자는 데는 이견이 있지만 국제관계학에서도 ‘국제적 상상’이라는 개념을 쓰곤 한다.

10년이 넘도록 이 이야기에 매달려온 지은이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해석’과 ‘이야기’의 힘을 말하고 싶었다”며 “저의 핵심 고민 가운데 하나는 ‘사실’ 또는 ‘진실’의 개념 자체와 그것이 ‘누구에 의해-무엇을 위해’ 구성되는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밝혔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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