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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스마트폰이 통찰을 죽인다

등록 2015-09-03 19:56

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통찰, 평범에서 비범으로
게리 클라인 지음, 김창준 옮김, 알키 펴냄(2015)

영국 케임브리지 도심에는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이글’이란 펍이 있다. 노벨상을 29명이나 배출한 캐번디시 연구소 근처에 있는 이 펍은 1950년대 초 디엔에이(DNA)의 분자구조를 밝혀낸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수시로 들러 맥주를 홀짝이던 곳이다. 20세기의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성취한 두 사람은 이곳 테이블 메모지 위에 이런저런 낙서를 하며 생명의 비밀을 풀어갔다고 한다. 크릭은 1953년 2월28일 바로 이곳에서 디엔에이 구조를 왓슨과 함께 발견했다고 처음 발표하기도 했다.

왓슨과 크릭에게도 디엔에이의 그 모양이 이중나선이라는 생각은 놀라운 것이었다. 사실 이런 통찰은 온전히 이들만의 생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단백질 분자의 구조가 나선형 끈이라는 사실(화학자 라이너스 폴링), 박테리아는 디엔에이에 유전자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세균학자 오즈월드 에이버리) 등 디엔에이가 유전자의 비밀을 갖고 있고 어떤 모양일 것이라는 걸 추론할 선행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왓슨과 크릭에겐 어느 순간 불꽃이 튀었고 다른 이들은 거기서 멈추었을 뿐이다.

<통찰, 평범에서 비범으로>에서 인지과학자 게리 클라인은 바로 그 불꽃이 뒤는 통찰의 순간에 주목한다. 다양한 통찰의 사례를 수집한 뒤 어떤 조건에서 통찰이 일어나는지 연구했다. 클라인이 정의하는 통찰이란 “더 나은 이야기로의 예상치 못한 이동”이다. “아 그래, 바로 이거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무언가 끝났다는 느낌, 그리고 이후에 모든 것이 새롭게 정렬되는 것을 말한다. 인류사의 바퀴를 굴린 위대한 발명뿐 아니라 일상사에서도 이런 통찰은 있다.

통찰이 생기는 조건을 클라인은 ‘연결’, ‘우연의 일치’, ‘호기심’, ‘모순’, ‘창의적 절망’ 등 5가지로 범주화한다. 연결은 왓슨과 크릭이 선행연구 속에서 관통하는 원리를 발견하는 것처럼 무언가 단서가 돼 조각 정보들이 엮이는 경우를 말한다. 창의적 절망은 급박한 상황에 몰려 나오는 임기응변인데 나중에 보면 묘수였던 통찰을 말한다. 거센 산불에 몰릴 때 앞에 보이는 갈대숲에 불을 지른 뒤 그 잔불 위에서 견디는 아이디어가 바로 이런 것이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머리가 말랑말랑한 사람, 빈틈없기보다는 장난 비슷하게 일하는 사람이 통찰과 친화적이다. 기업은 늘 통찰과 혁신을 장려한다고 하지만 실상 조직은 그 반대 성향을 갖게 마련이다. “이들은 예측 가능성을 가치로 보고, 뜻밖의 일에 움츠러들고, 완벽성과 실수의 부재를 갈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정관념으로 머리가 무거운 이른바 전문가들도 통찰을 질식시킨다.

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인공지능이 인간을 앞지를 것이란 예상이 나오는데 디지털은 통찰에 도움을 줄까? 클라인은 부정적이다. 프로그램을 더 강하게 설계할수록 통찰은 약해진다는 것이다. 정보시스템의 설계원칙은 보통 질서와 구조에 의존하지만 통찰은 대개 ‘무질서’하다. 구글 같은 뛰어난 시스템이 우리의 선호를 학습한 뒤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여줄 때, 또 페이스북이 내가 누르는 ‘좋아요’의 패턴을 알아낸 뒤 유사한 친구의 글들을 주로 노출시킬 때 우리는 혁신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통찰은 나와 다른 것들이 섞일 때 더 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 그럼 통찰을 위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회사 카페에서 노닥거려 볼까나?

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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