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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망명’한 이유

등록 2015-09-17 20:53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마음산책·1만2000원

줌파 라히리(48)는 오헨리문학상과 펜/헤밍웨이문학상, 퓰리처상을 석권한 첫 단편집 <축복받은 집>(1999)을 비롯해 소설책 네권이 모두 한국에 번역 출간된 작가다. 영국의 벵골계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하고 작가로서도 성공한 그가 돌연 이탈리아어로 ‘망명’을 했다. 그의 첫 산문집이기도 한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쓴 책이다.

그가 영어 대신 이탈리아어라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언어로 갈아 탄 까닭은 무엇일까. 라히리 자신은 그것이 우연에서 비롯된 사랑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1994년 처음으로 피렌체를 여행했을 때 거리에서 들었던 이탈리아어가 기묘하게도 “친숙하게 느껴졌”으며 “이탈리아어를 배우지 않으면 날 채울 수 없고 내가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

미국에 돌아와 작가로서 경력을 쌓는 동안에도 그는 꾸준히 이탈리아어를 공부했지만 그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2012년 여름 가족과 함께 로마로 이주했다. 로마 이주 여섯달 전부터는 영어로 된 글을 부러 외면하고 이탈리아어로만 읽었다. 그가 1년 남짓 이탈리아에 머물며 그 언어를 더 깊이 공부해 가는 과정이 책에 담겼다.

보답 없는 짝사랑처럼 시작됐던 공부는 ‘작은 책’(포켓 사전)을 들고 다니며 수시로 단어를 확인하고, 새로 배운 말은 공책에 적어 거듭 익히며, 서투른 이탈리아어로 일기를 쓰고, 문학 축제 발표문을 이탈리아어로 쓰다가는, 결국 그 말로 첫 단편소설을 쓰는 데에까지 이른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거의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는 영어를 버리고 이탈리아어라는 불안하고 불완전한 매체를 택한 자신을 가리켜 라히리는 “부서지기 쉬운 피난처에서 노숙자나 다름없이 살기 위해 훌륭한 저택을 포기한” 것에 비유한다. 남들 눈에 어리석게까지 보이는 이 선택의 배경은 무엇일까.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더듬더듬 사전을 찾아가며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면서 라히리는 오랜만에 순수한 글쓰기의 기쁨을 다시 맛보았다. 결핍이 오히려 자유를 보장하는 역설적인 상황. 벵골어라는 뿌리를 지닌 채 영어 환경에서 지내 온 부모님을 이해하게 됨은 물론, 벵골어와 영어를 상대로 한 자신의 싸움에서도 그 팽팽한 긴장을 해소해 줄 제3의 독립적인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영어에서 이탈리아어로 옮겨 가는 일을 그는 요정에서 월계수로 몸을 바꾼 다프네의 변신에 견준다. “변신은 격렬한 재생 과정, 죽음이요 탄생이다.”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변신이 작가에게는 결국 창조적 충동의 돌파구로 구실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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