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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오리니…출판은 운동, 독서는 저항

등록 2015-10-01 22:02수정 2015-10-02 15:50

1980년대 대학가는 대자보와 사투, 세미나의 시대이기도 했다. 88년 당시 한 대학가에 나붙은 6·10 남북학생회담을 주장하는 대자보를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1980년대 대학가는 대자보와 사투, 세미나의 시대이기도 했다. 88년 당시 한 대학가에 나붙은 6·10 남북학생회담을 주장하는 대자보를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⑪ 80년대 껍데기를 벗고서
1980년대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많다. 아니, 유산이 아니라 ‘현재’ 그 자체라 지루하고 징그럽기도 하다. 이제 ‘87년 체제’는 그 시대가 만든 불완전한 민주주의 질서를, ‘(3)86세대’는 그 시대가 낳은 독특하고도 독선적인 정치적 주체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80년대는 여전히 너무 강하게 살아 있는 신화이거나 ‘상처’라서, 그 시대의 경험과 기억 자체가 바로 정치적 자원이 되기도 했다. 정치무대의 전면에서 활동하는 많은 야당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여당 대표 같은 이도 그 시대의 유산이다.

1980년과 87년은 지울 수 없는 역사의 구획선을 긋게 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80년대는 70년대가 있어 가능했으며, 부정하고 싶다 해도 90년대는 80년대의 유산 아래에서 자라났다. ‘지속과 단절’의 변증법을 통해 80년대를 재평가하는 일은 중요할 것이다.

독서 문화사에서도 ‘지속과 단절’로 80년대를 읽는 일이 필요하다. 독서문화에서 80년대는 70년대 후반, 뒤로는 90년대 초반과 얼마나 같고 다른가?

박정희 체제 말기(1975~79년)에 들며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이 깨어나고, 학생과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도 변화의 조짐은 뚜렷했다. 특히 <상황> <뿌리깊은 나무> <씨알의 소리> <대화> 등의 잡지에 진작에 나타난 민중주의는 ‘<창비> 대 <문지>’라든가 ‘참여 대 순수’의 대립 구도로만 이해될 수 없는 새로운 지적·운동적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잡지사 자체를 바꾸다시피 한 <뿌리깊은 나무>나, 가혹한 억압에도 1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던 <씨알의 소리>에서의 문화적 민중주의와 지성의 동향을 보는 것은 중요하다.

80년대를 풍미한 사회과학 도서도 70년대 말부터 꽤 활발하게 읽히기 시작했다. 창비사의 책들 외에도 1978년부터 발간된 홍성사의 ‘홍성 신서’ <소유냐 삶이냐> <불확실성의 시대> <제3의 파도(물결)> 등이 잘 팔렸다. 80년대를 대표하는 출판사의 하나가 되는 한길사의 ‘오늘의 사상 신서’도 1977년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한국 근·현대 사학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80년대의 대표적인 책처럼 여겨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제1권)은 1979년 10월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79년 말부터 ‘서울의 봄’ 6개월간 1만5000여권이 판매되었다 한다.

80년대의 정치사처럼 지성사와 독서사도 어두움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억압이 극심했을수록, 다이내믹하고 치열한 저항도 전개된다. 두 가지를 합치면 거대한 희비극 또는 블랙코미디 한 편이 완성된다. 이때 억압과 저항은 정비례 관계에 있었다. 때릴수록 민중은 깊은 복수심에 불타며 더 강해졌다. 물론 와중에 피눈물 어린 희생이 따랐다. 결국 ‘운동으로서의 출판’ ‘저항으로서의 독서’가 꽃핀 한 시절이 펼쳐지고, 90년대 초까지 이어진 것이다.

유신말기 깨어나기 시작한 지성계
탄압 피눈물 속에 들불같은 ‘의식화’
‘페다고지’ ‘해전사’ ‘죽음을 넘어’ 필독서
후반 들어 대중적인 교재 출현

다시 쓰는, 거꾸로 읽는 교양서 거쳐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원전으로 나아가
‘꽃파는 처녀’ 등 북한원전에서 정점
대학가 독서모임은 재수생으로까지

읽지 말라는 책은 꼭 읽어야 할 책
함께 읽기는 투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 잊혀진 무서운 말, ‘의식화’

‘의식화’라는 단어는 대학생 자녀를 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나 레드콤플렉스를 가진 일반 시민들에게 ‘공포’였다. 어쩌면 의식화의 주체이자 대상이었던 대학생이나 노동자 자신들에게도 이 말은 무서운 말이었을 것이다. 물론 공안세력과 보수언론이 그 공포를 조장·과장했다.

파울루 프레이리 같은 남미의 민중교육론자들이 사용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 단어는 70년대 중반부터 한국 언론에 등장했다. ‘의식화’(conscientize)는 물론 좋은 말이다. 무의식이나 ‘무개념’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와 자신에 대해서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가 되어, 지배이데올로기에 찌든 부모나 학교 선생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모험에 나선다는 뜻이다. 이 집단적 모험이 바로 저항이자 운동이었다. 자기의식을 갖는다는 것, 거대한 사상에 지적·윤리적으로 동화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타자와 공유하거나 또는 남에게 전하는 것. 독서는 그런 행위의 다른 이름일 수 있었다.

86년 당국이 민민투, 자민투로부터 압수한 불법유인물이라고 발표했던 유인물과 책들. 연합뉴스
86년 당국이 민민투, 자민투로부터 압수한 불법유인물이라고 발표했던 유인물과 책들. 연합뉴스
■ 의식화의 ‘교양’과 ‘전공’

그런 자발적 ‘의식화’의 교재로 쓰인 책은 시대별로 다르고 수준별로도 달랐다. 문학 작품은 주로 초심자용이었다 할 수 있는데 박노해·김남주·황지우·신동엽의 시편들과 <난쏘공> <태백산맥> <무기의 그늘> 등도 ‘교양 필독’의 목록에 있었다. <어머니> <사이공의 흰옷> 등 외국 문학 작품과 <아리랑>도 꾸준히 읽혔다.

<전태일평전> <페다고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해방전후사의 인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같은 책은 80년대 내내 읽혔다. 그러나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80년대 초까지는 실로 엄청난 역할을 했지만, 80년대 후반에는 위상이 작아졌다. <어느 돌멩이의 외침>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민족경제론> 같은 책도 주로 80년대 초반에 읽혔던 책이다.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껍데기를 벗고서>(1987) <거꾸로 읽는 세계사>(1987)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1989) 같은 상당히 ‘대중적인’ 신입생용 ‘의식화 교재’는 1980년대 후반에야 나타났다. <철학의 기초 이론> <사적유물론> <자본주의의 구조와 발전> 같은 동구산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수준별로는 어떤가? 변증법적 유물론·사적유물론 서적을 ‘학습’하고 난 뒤에는 좀더 본격적인 정치경제학 책이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읽고,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원전’으로 나갔다. 그중에도 <포이에르바하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공산당선언> 같은 몇몇은 ‘교양’에 속해 있었다.

1987~89년 사이에 ‘공산당선언’ ‘임노동과 자본’ 등이 포함된 <맑스 엥겔스 저작선>(거름, 1988)과 <독일 이데올로기>(청년사, 1988),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든 <레닌 저작선>(거름, 1988), <레닌 전집>(전진, 1989~) 같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물론 일부는 이전부터 복사물의 형태로 나돌았다.) 국내 사회과학자들의 역량도 커져 있어서, 이 시기에 김수행 교수의 역본 <자본론>이라든가 <현실과 과학>(새길, 1988) 같은 잡지도 나왔다. 80년대 말이 되면 <노동해방문학>(1989), <노동자의 길> <노동계급> 같은 ‘전위’ 조직의 ‘기관지’들도 대학가 서점에 굴러다니던 때이다. 이런 ‘전공’ 책을 접한다는 것은 조직론과 사회구성체론 같은 복잡한 이론적 논의를 습득해 좀더 본격적인 ‘운동권’이 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주파(NL)가 되는 길을 걸은 대학생들의 경우, <강철서신>을 거쳐 학년이 높아지며 주로 항일무장투쟁사와 주체사상에 관한 책을 읽었다. 1980년대 말에는 북한 책들도 대거 수입 간행되었다. <김일성선집>(대동, 1988), <조선로동당략사>(돌베개, 1989)를 위시하여 <꽃파는 처녀>(아침, 1989) <한 자위단원의 운명> 등 문학작품도 나왔다. 북한사회과학원에서 낸 <조선전사>(푸른숲, 1988-89)와 <민중의 바다>(원제 <피바다>, 한마당 1988) 등은 1만부 규모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한다. 대규모의 ‘북한 바로 알기 운동’(1988)이 벌어지고, 임수경의 방북(1989) 등 통일운동의 물이 한껏 올랐던 시절이기도 했다.

■ 청춘들의 함께 읽기

혹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오해할까봐 덧붙여 놓는 건데, 여기서 말하는 ‘교양’과 ‘전공’은 물론 비유이다. 이 ‘교양’과 ‘전공’ 커리큘럼은 교수들이 모아 짜놓은 것이 아니다. ‘학회’와 동아리 같은 대중적이고 공개적인 단위나, ‘티(t)’ 혹은 ‘패밀리(fam)’ 등의 이름을 가진 비공개 모임들에서 통용되고 발전된 것들이다. 이는 선후배가 뒤섞인, 그리고 과와 단과대학의 경계를 넘어선 학생들이 운영하던 온갖 조직들의 자율 학습 프로그램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자발적·공동체적 책 읽기의 시대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인구의 규모와 질은 80년대와 비교하기 어렵다. 소위 ‘명문대생’부터 ‘3류 대학생’까지, 동북 끝 강릉에서 서남단의 제주도까지, 대학뿐 아니라 공장·야학·교회·사찰에 다니던, 셀 수 없이 많은 청춘들이 ‘세미나’에서 같이 읽었다. 심지어 재수학원 종합반 동기들의 독서모임도 있었고, 고교 동문회에서 학습팀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팀원들 중에는 원래 숭고한 영혼을 가진 이들도 있었겠지만, 시대의 기운이 아니라면 ‘변혁’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또 결국 그렇게 된) 소심하고 비루한 영혼을 가진 자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가히 ‘책과 혁명’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사회과학의 시대’나 ‘문학의 시대’는 저절로 따라 이뤄진 것이 아니겠나.

저 ‘같이 읽기’야말로 80년대식 책 읽기가 지닌 정치성의 핵심이며,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 그리고 학교 선생과 부모들이 읽지 말라고 금지한 것을 꼭 읽는 것, 기실 그 어른들은 겁이 나서 읽어 보지도 못한 것, 간혹 읽다가 잡혀가는 것, 읽고 흥분하여 정부와 어른들을 향해 돌 던지는 것, 숨기고 불태워야 하는 것. 그런 것을 길거리에서 어깨 겯듯, 같이 읽은 것 말이다. 그것은 일부 억압성도 함유한 거대한 집합성이었다.

기성세대와 보수세력은 이에 대한 대응에 골몰했다. 대학에서도 국사·국민윤리·교련 같은 과목들을 통해서 반의식화 우경화 교육을 실시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왜?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읽은 책의 헤게모니는 지적 헤게모니라기보다는 윤리적 헤게모니였기 때문이다.

■ 다시 읽기

이명박근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응답하라 1988>도 곧 방영된다고 했던가? 그렇다. 먼저 자신과 시대를 성찰하고 극복해야 할 사람들은 물론 기성세대가 되고 훈장을 단 486·586들 자신이겠다. 그리고 어떤 기초 체력을 다져 우리 속의 ‘어버이연합’이나 ‘일베’를 극복하고 근저에서부터 민주주의를 되살려야 한다면, 단 한 가지 증명된, 80년대가 남긴 교훈적인 방법이 있다. ‘같이 읽기’다. 무엇을? 인문·사회과학 책을. 어떻게? 실천적으로!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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