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독일 베를린예술대학 교수. 사진 문학과지성사 제공
“에로스의 종말은 타자가 없어지는 것이고, 근본 이유는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자아가 없으면 공허해진다. 그래서 자해를 하거나 ‘셀카’를 찍는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속에 침몰하고 빠져 허우적거리다 익사한다.”
<피로사회>의 저자인 한병철 독일 베를린예술대학 교수가 또다시 매력적인 책을 들고 귀환했다. 자신의 새 책 <에로스의 종말>(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발간을 맞아 그는 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책의 내용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 교수는 <피로사회>, <투명사회>, <심리정치> 등의 저작으로 한국과 유럽에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재독 철학자다. 이번 새 책에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사랑의 재발명’이란 서문을 썼고, 출간과 동시에 독일·스페인·그리스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언론이 책을 다뤘다.
한 교수는 이날 회견에서 “만족스러운 ‘나’는 타자를 통한 선물”이라며 “독일의 신뢰있는 조사를 보면, 10대 청소년 중 20% 이상이 칼로 자해를 한다”고 덧붙였다. “타자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몸을 느낄 수 없고, 우울증이나 경계장애를 겪으며 자해를 하고 ‘셀카’를 찍는 등 나르시시즘적으로 자기의 존재 증명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신자유주의적 시스템 때문이라고 했다. 현대인이 자기계발, 피트니스 등으로 몸을 경영하고 관리하는 ‘자기경영 주체’가 된 것도 같은 이유로 비판했다. “현대인이 스스로를 ‘경영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소외된다”는 것이다. ‘살덩어리’를 전시하는 ‘포르노화’ 또한 에로스의 종말 시대에 대한 징후라고 그는 덧붙였다. “우리는 사랑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자에 대한 투자를 잘 조정한다. 절대적 손실이 없도록,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지 않도록 경영한다. 파산하지 않게 주식 투자하듯 위험을 피하고, 잘 경영해 이익을 남기도록 사랑이 발달했다.”
한 교수는 또 “신자유주의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각자가 기업’이라는 말을 하면서 연대를 끊어버린다”고 지적했다. “연대가 있어야 만족스런 자아가 생기는데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는 연대, 연결, 사랑, 친구, 이웃이 끊어지고 모두가 ‘나’ 안에 침몰해버리고 만다”는 견해다. 그는 “자본주의는 얼마 안가 안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전망하며, “다른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의식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고,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 때문이다”라고 했다.
한 교수는 회견 서두에서 글로벌 정치 문제에 대해서도 작심한 듯 발언했다. 특히 아프리카와 시리아의 난민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연대 책임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삼성도 글로벌 기업이고, 한국 경제도 글로벌 경제의 일원이므로 난민들의 고통을 외면해선 안된다.”
이런 제안도 덧붙였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말하고 싶다. 당장 지중해에 비행기와 배를 보내 아프리카·시리아 난민을 구하고 원하는 몇만명을 한국에 데려와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 돈 많은 나라가 되었으니 이제 도덕적 나라가 돼야 한다. 세계의 문제를 우리 문제로 갖고 와야 한다.”
내년에는 그의 대표적 저작인 <피로사회> 출간 5주년을 맞아 독일에서 기념판이 나올 예정이다. 한 교수는 다음 책인 <아름다움의 구원>에서는 ‘제의’의 문제를 다룰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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