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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에로스의 종말’ 펴낸 한병철 “철학자들이 정치 참여해야”

등록 2015-10-12 21:11

한병철 교수. 사진 문학과지성사 제공
한병철 교수. 사진 문학과지성사 제공
<피로사회> <투명사회> <심리정치> 이은 신작
<에로스의 종말> 펴낸 한병철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
13일 광화문 교보문고 23층 컨벤션홀 독자 강연
최근 <에로스의 종말>(문학과지성사)을 펴낸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 한병철 교수가 13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23층 컨벤션홀에서 독자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연다. 총 100여명의 강연 참석 인원 신청이 일찌감치 마감됐을 정도로 인기다. 그에 앞서 지난 5일 기자간담회 때 한 교수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는 <에로스의 종말> 뿐 아니라 지식인의 자세, 세계의 난민 문제, 인간 존엄성의 문제 등 다양한 방면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꽁지머리 헤어스타일의 철학자

지난 5일 정오 무렵.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한병철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가 서울 광화문 한 식당에 들어섰다. 신작 <에로스의 종말> 출간을 기념해 여는 기자간담회장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35년 동안 한국어를 잘 하지 않았다. 모국어는 정말 어머니하고만 하는 말이다. 한국어로 하면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한다. 그래서 굉장히 문제가 많다. 양해를 구한다.”

사람들은 그를 ‘재독 철학자’로 일컫는다. 국내에 잘 알려져있는 <피로사회> <투명사회> <심리정치> 최근 <에로스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의 책들은 모두 원래 독일어로 쓰였다가 한국어로 옮긴 것들이다. 이번 책의 경우, 독일 언론뿐 아니라 스페인, 그리스의 언론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10여명의 기자들 앞에서 그는 품 속에서 2~3장 가량 분량의 종이를 꺼내 펼쳐놓았다. 스프링 노트에 한국 언론 앞에 하고싶었던 말을 미리 써서 뜯어온 것이다. 한 교수의 손에는 독일 주간지 <슈피겔>이 들려 있었는데, 잡지 표지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마더 테레사로 묘사한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내 책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라며 한 교수가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유럽으로 밀려들고 있는 난민과 관련된 문제였다.

“유럽, 독일 언론은 요즘 아프리카 난민, 시리아 난민 문제만 취급한다. 이 <슈피겔>도 전체가 시리아 난민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이 매체는 ‘인간 존엄성’에 바탕을 두고 난민을 조건없이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 공동체 전체에 도덕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독일 총리는 조건없이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했다. 굉장히 용감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독일에 매일 2만명의 난민들이 왔다. 물론 네오 나치도 있지만 독일 국민들은 대체로 도덕적 의식이 굉장히 높아 난민이 오면 플래카드를 들고 환영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난민들이 독일 수상을 ‘무터 테레사’(마더 테레사)로 보는 것이다.”

한 교수는 독일 언론에 최근 여러편의 글을 기고하며 난민 문제에 대한 유럽 전체의 책임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세계 각국이 스마트폰에 쓰이는 희토류를 싸게 수입하기 위해 독재자들에게 돈을 주고, 그들 정권 유지에 기여하는 반면 그나라 백성들은 굶어죽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말하는 ‘서방’은 유럽뿐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 중국을 포함한다”고 했다.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오려는 난민들의 고통과 가난에 대한 책임이 유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몇번이나 힘주어 말했다. 한국 또한 책임이 무겁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인터넷으로 한국 언론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한겨레>도 여기에 대해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며 기사를 쓰지 않는다. 삼성도 글로벌한 기업이고, 한국 경제가 글로벌 경제에 속해있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고통에 대해서는 우리도 외면해선 안 되는 가해자다. 거기에 대한 책임은 우리도 져야 한다. 시리아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한국에 대해 “시선이 좁아 돈 버는 것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제 ‘돈만 버는 나라’가 아니라 ‘도덕적 나라’로 성장하고 글로벌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며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이와 함께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장 지중해에 배를 보내 난민을 구하고 비행기를 보내 요르단이나 터키의 난민 수용자들 가운데 한국에 오고 싶은 이들을 몇만명씩 데려와야 한다.”

벌거벗은 삶을 연장하며 사는 삶

한 교수는 이슬람 사회와 서구의 갈등에 대해 “지역적 분쟁이 아니라 이해적 분쟁”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심각한 충돌은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문제에서 파생됐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슬람국가’(IS)와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관계에 대해 기고문을 써서 독일 신문사와 갈등을 빚은 일화도 소개했다. 이슬람국가와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한 그의 주장에 독일 신문사가 동의하지 않았고, 해당 부분을 신문사가 자신의 칼럼에서 들어냈다는 것이다. 항의 끝에 결국 윤전기를 세웠고, 원래 자기 주장을 글에다 온전히 반영할 수 있었다고 그는 전했다. “알카에다는 서구를 향해 ‘너희는 삶을 사랑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금연, 건강하게 살자면서 삶을 늘리기만 한다. ‘벌거벗은 생명’(조르주 아감벤)을 연장하는 것이다. 건강 진단을 하며 오래 사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삶이다. 의미 없는 삶인데도 수명을 늘리기만 한다. 죽기는 싫으니까 ‘그냥’ 산다.”

조르조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에서 해설했던 ‘벌거벗은 삶’이라는 개념은 <피로사회>부터 최근작 <에로스의 종말>까지 한 교수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피로사회>에서 그는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단순한 생명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생명은 신성하다”고 쓴 바 있다. 이번에 낸 책 <에로스의 종말>에서도 그는 “죽음의 부정성을 밀어내버린 긍정사회는 오직 ‘불연속성 속에서 생존을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지배하는 벌거벗은 삶의 사회다. 그러한 삶이란 노예의 삶일 뿐이다”라고 썼다. 껍데기 뿐인 삶이라고 할까. ‘사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삶’은 의미없는 삶이라는 말이 아닐까. 1999년 하이데거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죽음과 타자성>이라는 책을 낸 바도 있다.

사랑과 에로스를 다룬 <에로스의 종말>에서 그는 포르노 또한 ‘벌거벗은 삶’과 연관시켜 썼다. “포르노는 전시의 대상이 된 벌거벗은 삶과 관련된다. 포르노는 에로스의 적수다.” 논리적으로 연결시키기 쉽지 않은 말이지만, 조금 더 읽어보면 그가 지금까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를 비판적으로 설명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밀도, 표현도 없는 얼굴, 오직 전시성만으로 환원되어버린 맨얼굴은 음란하고 포르노적”이라며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고 책에 썼다.

한 교수는 지식인의 정치참여에 대해서도 또한 작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 독일 또한 지식인, 교수들이 사회문제에 개입하지 않아 홀로 외롭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교수뿐 아니라 대학 전체가 비정치화되고, 학생들은 아예 어린아이처럼 됐다”며 “정치적 의식이 없어 강의에만 들어가면 ‘우리는 우리를 다시 정치화해야 한다’고 소리지른다”고 말했다.

“내가 서러운 게 무엇인가 하면, 철학자로서 사회문제에 개입하고 그런 사람이 독일에도 없기 때문이다. 저만 외롭게 이걸 하고 있는데 더 많은 교수들, 철학자들이 소리를 높이고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데. 내 교육의 의무는 학생들을 재정치화하는 것이다.”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 그저 ‘좋아요’ 뿐

긴 말을 쏟아낸 끝에 40여분이 지나 비로소 그는 책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번 책 <에로스의 종말> 첫 문장은 “최근 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려온다”는 문장이다. 알랭 바디우가 서문 ‘사랑의 재발명’을 썼고, 출간과 동시에 호평을 받았다.

“이제는 사랑이 불가능하다. 사랑의 다양한 옵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타자’ 자체가 없어져서이다. 그저 자기 확신을 가져다주는 페이스북 친구나 ‘좋아요’처럼 ‘자신의 거울’밖에 없는 것이다. 타자가 그렇게 전락할 때 진정한 타자는 사라진다. (거울을 보고 빠지는) 나르시시즘이 에로스 종말의 궁극적인 원인인 것이다. 타자가 없어지면 자아도 없고, 공허해진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와 다르다. 나르시시즘은 나와 타자의 경계가 없다. 자기애는 나와 타자의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해 그는 오랜 시간 설명했다. 동양 사상이나 종교에서는 ‘타자’가 없어도 자아의 인식이나 성찰이 가능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타자란 말이 서구언어이지만 실제 타자는 남일수도, 신일수도, 공(空)일 수도 있다”고 했다. ‘직면’할 수 있는 경계, 자아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타자일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이는 그의 생각이 그저 서구전통에 머물지만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도 했다.

“자해나 셀카는 나르시시즘 때문”

한병철 교수. 사진 문학과지성사 제공
한병철 교수. 사진 문학과지성사 제공
그는 독일에서 자해하는 청소년, ‘셀카’(자기 사진을 자기가 찍는 것, 셀피) 찍기 등에 대해 위험한 징후라고 여기고 있었다. 스스로를 느끼기 위해 자신의 몸을 그어댄다는 것이다. 그는 “독일의 신뢰있는 조사를 보면, 10대 청소년 중 20% 이상이 칼로 자해를 하고, 4~5%가 매일 자해를 한다”고 말했다. 타자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몸을 느낄 수 없고, 자해를 하거나 ‘셀카’를 찍으며 나르시시즘적으로 존재증명을 한다는 것이다.

“독일에는 틴에이저의 자해가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상처는 셀카의 뒷부분이다. 자기를 느끼기 위해 피를 흘리고 공허를 극복하며 자기 사진을 찍는다. 동떨어진 현상이 아니라 같은 현상이다. 자기 몸을 자신이 느끼지 못하니까.”

이와 함께 그는 피트니스 등 스스로 몸을 경영하고 관리하는 신자유주의의 자기경영적 주체형성에 대해 비판했다. “내가 내 몸을 경험해야 하는데, 내 몸은 피트니스의 대상이 돼버렸다. 몸을 경험하는 대신 몸을 경영한다. 그러다보니 몸이, 내가 나로부터 소외되어 떠난다. 마르크스 말대로. 우리 사회가 굉장히 변태적인 것 같다. 얼마 전에 한국에 왔는데, 어느 여학생이 셀카를 찍는 것을 봤다. 그것은 도와달라는 말이다. 공허가 있고 그러니까 집에서 자기 몸을 긋고, 그게 현대의 개인이다. 자해하며 몸 안의 긴장감이 없어지고 고민도 없어지고…. 잠시만 그럴 뿐이지만. 마약처럼 금단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변태적이고 슬픈지.”

이 시대의 사랑에 대해 말하며 그는 살덩어리를 전시하는 포르노화 또한 에로스 종말 시대의 징후라고 덧붙였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자에 대한 투자를 잘 조정해 절대적 손실이 없도록,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지 않도록 경영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는 자신의 연애사도 언급했다. “대학 다닐 때 연애를 했는데, 여자친구와 떨어져있는 동안 더욱 관계가 강렬해졌다”고 했다. “요즘엔 카카오톡이라는 게 있으니까 금방금방 불러들일 수 있잖아요? 동네 강아지처럼?”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사랑이라는 게, 멀리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거리가 없는 것과 가까움은 완전히 다른데, 지금은 거리가 없다”고도 했다.

“타자에게 투자를 한다. 파산하지 않도록 주식투자하듯 투자하며, 그래야 상처도 막을 수 있으니까. 사랑에 빠지는 것도 너무 위험하니까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 피하는 게 아니겠나. 사랑을 잘 경영해 이익을 남기도록 한다. 손실이 없도록. 그렇게 사랑이 발달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를 보면, ‘사랑은 우리 주도권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밑도끝도 없이 우리를 급습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한다. 상처받으며 개인이 성장하는 것이다. ‘나’라는 자아가 고통받고 상처받으며 성장하는데, 상처받지 않으려면 자아는 비어버린다. 비어버린 자아가 셀카를 찍고 자해를 하고 피가 흐르면 만족하는 것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보라. 사랑이 성과보장 일자리 계약으로 생각되는 것에 대해 여자 주인공이 어리둥절한다. 사랑은 ‘우리가 할 수 있지 않다’ 그런 영역 속에 가능하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사랑을 끌어내리다보면 사랑이 죽어버린다.”

신자유주의가 각자를 기업화한다

그가 심리정치, 피로사회, 에로스의 종말을 얘기하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의 시스템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각자가 기업’이라는 말을 하면서 연대를 끊어버린다”고 말했다. “연대가 있어야 만족스런 자아가 생기고 우정이 있고 사랑이 있어야 자아가 생기는데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연대, 연결, 사랑, 친구, 이웃이 다 ‘나’ 안에 침몰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서는 탈규제, 유연화가 강화된다. 연대는 효율을 높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 삶이 가장 아이디얼한 삶이 아니라, 더 좋은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얼마 안가 안으로 붕괴할 것이다. 내 책은 의식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다. 조금씩 바뀌리라 본다. 우리가 이성을 찾으면, 이성에 도달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는 게 가장 짧은 길이다.”

그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아직 여럿 남았다. 한 교수는 사랑이 없어진 시대의 ‘에로스’를 말하지만 내용상 사실은 ‘타나토스’를 말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책에서는 죽음의 본능, 죽음에의 충동인 타나토스 없이 주로 에로스의 개념만으로 논의를 진전시킨다. 왜 그럴까? <에로스의 종말>을 비롯한 그의 책에서 말하는 미셸 푸코 이론에 대한 해석도 읽으며 고개가 갸웃한 지점이 있다. 다른 학자들은 미셸 푸코의 통치성이나 생명정치에 대한 논의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싹을 발견하기도 하고,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을 해명하는 열쇠를 찾기도 하지만 그는 푸코를 신자유주의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물음에 그는 한국어판 책을 살펴보며 “푸코는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가 폭력으로 전도되는 것을 못 보고 일찍 죽었으며, 생각을 넓혀가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부분 또한 애매하고 좀더 분명한 설명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한 교수는 신자유주의와 지금 우리 삶에 대해 무척이나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 그가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고민을 쉽사리 그칠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직 한국사회에 소개되지 못한 그의 책이나 글은 여전히 많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문학과지성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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