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구성체 논쟁’을 촉발시킨 고 박현채 전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 <한겨레> 자료사진
박현채-이대근 ‘자본주의 논쟁’ 이후
우리 사회 진단·바람직한 변화방향 모색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적 편향 끝 소멸돼
우리 사회 진단·바람직한 변화방향 모색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적 편향 끝 소멸돼
혁명이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다. 혁명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1980년대에 저희는 오직 혁명을 위해 공부하고, 노동현장에 뛰어들고, 조직활동을 했습니다.”(이진경, <동아일보> 2001년 4월10일 대담)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 근간으로 하는 혁명을 유일한 대안으로 여겼다.
하지만 ‘뿌리’는 같아도 구체적 방법론에선 쉬이 합의가 되지 않았다. 한국사회를 읽어내는 시각부터 갈렸다. 백가쟁명이 시작됐다. 한국사회의 성격 분석과 혁명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 일련의 논전은 훗날 ‘사회구성체논쟁’이란 길고 어려운 이름을 얻게 된다. 줄여서 흔히 ‘사구체 논쟁’이라 불린 이 ‘싸움’은 80년대 중반 한 ‘부정기 간행물’에 실린 논문 두 편에서 ‘발화’되었다. 꼭 30년 전 이맘때 일이다.
앞서 <민족경제론>으로 이름을 얻었던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1934~1995·1989년 이후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이 당시 성균관대에 재직하던 대학 후배 이대근 교수(무역학과)와 따로 한 편씩 논문을 준비해 1985년 10월 발간된 <창작과비평>(창비) 제57호에 기고한 것이다. 전두환이 집권한 1980년 여름 제56호를 내고 긴 휴지기에 들어갔던 창비가 ‘한국 자본주의 논쟁(1)’이란 이름으로 만든 집중기획이었다.
박현채 선생은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Ⅰ)’이라는 논문에서 당시 운동권 일부와 학계에서 주로 수입해 논의하고 있던 종속이론을 포함한 주변부 자본주의론과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동시에 비판했다. 이 두 이론은 “그 동기나 배경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한 노력에서 중요한 예단 또는 오류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는 한국 사회가 국가의 적극적 경제 개입을 특징으로 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에 관하여-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붙여’라는 논문에서 이대근 교수는 한국사회를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이 관철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서구 자본주의 사회와 동일시할 수 없는 특수한 성격의 자본주의”인 주변부 자본주의로 진단했다. 그는 중심국가와 주변국가로 짜여 있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한국은 부를 계속해서 중심부에 빼앗기는 주변부에 속해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논쟁은 창비와 박 선생의 ‘합작품’이었다. 시작은 당시 창비 편집진이 했다. 그들은 ‘1980년 광주’를 겪고 난 뒤 1984년께부터 노동·학생 운동에 마르크스주의와 종속이론 등이 활발히 수입·소개되고, 이를 토대로 나름의 혁명이론을 전개하는 지하유인물(팸플릿)이 제작·유통되는 상황을 보면서 1920~30년대 ‘일본 자본주의 논쟁’, 중국혁명 과정의 ‘봉건파-자본파 논쟁’과 같은 논의가 우리 사회에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박 선생은 창비가 두번째로 제안했을 때 비로소 받아들였다. 당시 상황을 나중에 박 선생한테 직접 들었다는 이일영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박 선생 본인이 꼭지를 두 개로 잡고, 대학 후배인 이대근 교수와 역할 분담을 해서 쓴 것”이라고 전했다.
이렇게 시작된 논쟁은 운동권과 강단 사회주의자들이 가세하면서 혁명의 성격과 주력군, 계급동맹, 주요 타격방향 등을 둘러싸고 복잡하고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시에이(CA·제헌의회), 피디(PD·민중민주), 엔엘(NL·민족해방) 파가 명멸하며 대립과 논쟁을 이어갔지만, 넓게 보면 레닌·스탈린주의가 담긴 소련판 ‘교과서’를 따르는 정파와 북한의 조선노동당 정권, 주체사상을 혁명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세력이 양대 축을 이뤘다.
그러나 박-이 논쟁이 처음부터 혁명론의 정립이나 마르크스주의의 복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학계 인사는 “그때 창비는 운동권에서 프티 부르주아 집단으로 간주되고 있었는데, 박 선생이 혁명론을 제기할 생각이었다면 창비를 선택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일영 교수도 “박 선생의 문제의식은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 운동의 큰 방향, 거시적 비전을 논의해 보자는 차원으로 이해한다”며, 나중에 논의가 운동권으로 확산되면서 “이념적으로 흘러갔지만, 박 선생의 실사구시적인 입장은 한국사회과학연구소의 설립에서 분명해진다”고 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의 진전은 한국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바꿔놓았다. ‘반독재 민주화’의 시대가 저물면서 소수가 된 운동권은 고립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관념의 구름 위에서 지속되던 사구체 논쟁은, 이념적 기반이자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1990~91년 사실상 막을 내렸다.
한때 혁명을 논하던 사구체 논쟁은 왜 흔적없이 사라졌을까? 무엇을 남겼을까? 이 물음에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정치학 박사)은 이런 답을 내놓았다. “정치적 민주화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차원의 민주화까지를 들여다보게 한 혁명적인 전환이었다. 박 선생의 최초 문제제기는 민족·민중을 체제 분석의 중심으로 가져와 다른 종류의 논의를 촉발시키고 80년대의 변화 욕구를 앞장서 제기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나중에 전개된 사구체 논쟁은) 민중을 이념에 투사된 낭만적 존재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말고도 중요한 게 더 있는데, 계급에 치우치는 이론적 편향에 빠지면서 학생은 물론 일반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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