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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돌과 피와 불 속에서도 삶의 부드러운 과육은 자란다

등록 2015-11-12 20:58수정 2015-11-13 10:11

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는 2차대전 말기 고향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의 기억을 자전소설 <돌의 연대기>에 담았다. 문학동네 제공
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는 2차대전 말기 고향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의 기억을 자전소설 <돌의 연대기>에 담았다. 문학동네 제공
알바니아 작가 카다레 자전소설
2차대전 말기 고향 유년기 그려
적국 점령에서 이념 전쟁까지
돌의 연대기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문학동네·1만4800원

알바니아 출신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79)의 <돌의 연대기>는 2차대전 끝무렵 고향에서 보낸 유년기를 되살린 자전소설이다.

카다레의 고향인 지로카스트라는 그리스 국경에 가까운 알바니아 남쪽, 오토만 양식 석재 건축물로 이루어진 도시다. 1939년 알바니아를 점령한 이탈리아는 이듬해 지로카스트라에 비행장을 짓고 내처 그리스를 침략하지만 영국 공군과 그리스군의 반격으로 지로카스트라에는 폭격이 가해지고 주민들은 공습을 피해 지하실과 성채로 피신을 한다.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하지만 대신 이번에는 독일이 알바니아 전역을 점령한다. <돌의 연대기>는 카다레의 고향 도시 지로카스트라를 배경 삼아, 이탈리아 점령기부터 독일군이 입성할 때까지 격동의 시기를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그린다.

6·25를 유년기에 겪은 한국 작가들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전쟁은 낯선 느낌을 수반한다. 유년의 순수와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이 맞부딪치면서 빚어내는 불일치와 모순 때문이다. <돌의 연대기>에서 주인공 소년은 점령국 이탈리아가 만든 비행장과 비행기에 매료되며, 영국군 비행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한 방공호로 제 집이 지정된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점령당하지 않은 도시란 어떤 곳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는 이 아이는 어른들이 걱정하는 ‘알바니아’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영국 비행기들은 매일 규칙적으로 우리를 방문했다. 그것들은 거의 정해진 시각에 나타났으므로 사람들은 일정표에 짜인 불쾌한 일과에 적응하듯 폭격에도 웬만큼 적응해갔다. 내일 폭격이 끝나고 카페에서 보자든지, 내일은 새벽같이 일어나 폭격이 시작되기 전까지 집안 청소를 마칠 거라든지 하는 말들이 오갔다. 자, 이젠 지하실로 내려가자, 폭격이 시작될 시간이야, 라고도 했다.”

전쟁의 공포와 혼란 속에서도 일상은 이어지고 아이는 자란다. 소년은 가까운 동무 일리르와 우표로 땅따먹기 놀이를 하는가 하면, 너무 이른 나이에 읽은 <맥베스>를 제 주변 인물과 상황에 대입해 이해해 보려 한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보며 마음 설레다가는 또래 소녀와 사랑을 흉내내기도 한다. 지하 방공호에서 서로 껴안고 있다 들킨 청춘 남녀가 강제 이별이라는 처벌을 받을 때만 해도 상황이 그다지 험악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소설 후반부로 가면서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순진한 아이의 눈에도 전쟁의 잔인한 민낯은 여지없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열일곱살 먹은 소년의 막내이모가 유격대가 되어 입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시청에 불을 지르며, 일리르의 친형 이사가 점령군 사령관을 살해한 혐의로 처형당하자 그 친구인 야베르는 그 과정에 연루된 제 작은아버지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가까운 이웃집 남자가 이사를 고발한 첩자로 밝혀져 살해당하고, ‘적색공포에 우리는 이렇게 응한다!’와 ‘이렇게 우리는 백색공포에 응할 것이다!’라는 천 글씨가 각각 덮인 주검들이 광장 양쪽 끝에서 발견되며, ‘민중의 적’으로 선포한 남자를 처형하던 외팔이 유격대원은 아버지와 총탄 사이로 파고든 딸을 죽게 만든 죄로 즉결 총살형에 처해진다. “도시는 악몽을 꾸고 있는 듯 헐떡였다.”

소설 제목은 물론 돌로 된 도시 지로카스트라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돌과 불과 피 속에서 꾸리는 삶이란 척박하기 그지없는 것일 텐데, 그렇더라도 추억은 힘이 센 것이어서 책 앞머리 묘사에서는 떠나온 고향 도시와 유년기를 향한 그리움이 읽힌다.

“이상한 도시였다. 무슨 선사시대의 존재처럼 겨울밤 불쑥 계곡에서 솟아나 힘겹게 산허리를 오르고 있는 듯한 도시. 도시의 모든 것이 돌이고 노후해 있었다. (…) 회색 돌기와로 덮인 지붕들은 거대한 비늘을 연상시켰다. 이처럼 굳고 단단한 외피 속에서 삶의 부드러운 과육이 생장하고 있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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