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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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말기 파리 해방 직후 ‘프랑스 대숙청’은 지식인의 행동과 책임의 막중한 관계를 서슬 퍼런 목소리로 증언한 가장 뜨거운 역사의 현장일 것이다. 이 현장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것은 언론인 주섭일씨가 1999년에 펴낸 <프랑스의 대숙청>(2004년 개정판명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이었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가차없는 단죄 과정을 선명하게 돋을새김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친일파 청산 좌절과 대비하고 있다.
피에르 아술린이 쓴 <지식인의 죄와 벌>(원제:‘지식인 숙청’)은 주섭일씨의 책에 앞서 1996년 프랑스에서 나온 ‘나치 협력자 청산’에 관한 역사적 평가서다. 주씨의 책이 부역자 단죄의 엄정함과 단호함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이 책은 그 숙청 과정을 역사적 거리를 두고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은이 아술린은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저항자들의 기소내용과 부역자들의 변호논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저항자들 사이에서 처벌의 수위를 놓고 벌어진 논쟁도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역사의 공과를 냉정하게 기술하는 지은이의 태도가 반역자 숙청이라는 정치적으로 완료된 결과의 뒷받침을 받고 있기 때문임은 어렵지 않게 짐직할 수 있다.
알려진 대로 파리를 해방한 샤를 드골의 임시정부는 나치 부역자 청산에 즉각 나섰고, 협력자들 중에서도 지식인들의 부역행위를 훨씬 더 가혹하게 단죄했다. 이 책은 왜 지식인들의 더 호되게 처벌받았는지, 그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지식인이란 특히 언론인과 문필가를 말한다. 기자와 문인에게 글은 곧 칼이며 말은 곧 총이다. 그들은 언어의 힘을 빌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다. 그들은 독일 점령기(1940년 6월~1944년 8월) 4년 동안 신문과 잡지와 방송을 통해 나치 점령을 정당화하고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순리임을 역설했다. 그들의 언어는 요컨대, 거대한 선전기관이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파리가 해방되자 나치 군대를 따라 독일로 망명했다. 파리에서 부역자 단죄 바람이 불자 이들은 1944년 11월 지식인 숙청을 비난하는 ‘재독 프랑스 지식인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 작성자들에 대해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지난 4년 동안 신문지상을 통해서 친독 의용대와 게슈타포, 나치 친위대(SS)가 저항민병대, 유대인, 공산당원을 사냥하는 데에 철저하게 부역했던 장본인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이제 분개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이 분개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념에 따라 행동했던 작가와 기자들을 기소하고 그들의 책을 판금시키거나 폐기처분하는 일이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역 지식인 처벌 수위를 놓고 프랑스 지식계는 치열한 논쟁으로 들끓었다. 레지스탕스 출신 지식인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대표적인 논전은 프랑수아 모리아크와 알베르 카뮈의 ‘관용론’ 대 ‘정의론’ 격돌이었다. 모리아크는 과도한 숙청을 우려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학살자와 희생자라는 쳇바퀴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란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제4공화국이 게슈타포의 장화를 신어서는 안 된다.” 카뮈는 이렇게 맞섰다. “비록 인간의 정의가 너무나 불완전다하고 해도, 인간의 정의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정직함을 필사적으로 견지함으로써 그 불완전함을 교정하고자 한다.”
카뮈의 주장이 더 힘을 얻었음은 물론이다. 조르주 쉬아레즈, 알베르 르죈, 스테판 로잔 같은 부역 언론인들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35살의 언론인 로베르 브라지야크를 기소하면서 검사는 이렇게 논고했다. “브라지야크의 반역은 무엇보다도 지성의 반역입니다. 자존심의 반역입니다.” 문인으로서 탁월한 재능을 모두들 아까워했지만, 그 탁월한 재능 때문에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왜 돈으로 부역한 자들보다 말과 글로 부역한 자들이 더 큰 벌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작가 베르코르는 단호하게 답했다. “기업가와 작가를 비교하는 것은 카인과 아벨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카인의 죄는 아벨에 그친다. 그러나 악마의 위험은 무한하다.”
지은이는 이 시기 지식인 숙청에 어떤 야만적 보복의지와 개인적 권력의지가 들어 있었음을 인정한다. ‘프랑스 대숙청’은 결코 정의의 저울이 완벽하게 평형을 이룬 이상적인 숙청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숙청의 시기가 잔인한 학살의 시대 뒤끝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사람들에게 완전히 침착한 이성을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성인의 모범이었던 시몬 드 보부아르가 브라지야크 사면 탄원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히틀러의 선전자들을 엄벌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말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여긴다. … 독가스실만큼이나 살인적인 말들이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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