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그 가치와 의미’ 학술대회
학술대회서 팽팽한 의견 대립
“고려인들이 호국정신으로 만든 팔만대장경의 동시대적 순수성을 지켜야지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덧붙인 경판들은 대장경에서 빼서 별도 지정하는 게 타당합니다.”
“팔만대장경은 후대에도 생생한 신앙 대상이었습니다. 완결성을 위해 후대 경판도 당연히 대장경의 일부가 되어야지요.”
팔만점 넘는다고만 어렴풋이 알려진 고려 팔만대장경 전체 경판 수의 어림 기준을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 열띤 논쟁이 펼쳐졌다. 30일 오후 서울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 문화재청과 조계종불교문화재연구소가 주최한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그 가치와 의미’ 학술대회에 모인 전문가들은 나름의 선정기준과 명분을 앞세워 팽팽한 입씨름을 벌였다.
1915년 조사한 8만1258판에
2000년 이후 94판 추가 확인
그중 일제강점기때 만든 36판 등
후대에 더한 경판 인정 놓고 토론 팔만대장경은 13세기 고려인들이 몽골 침략을 맞아 호국정신 아래 역대 불교경전을 모두 모아 새긴 거대한 경판들 모음이다. 불교경전을 집대성한 경판집으로 세계 최고일 뿐 아니라 완벽한 편제로 후대 대장경 간행의 필수 전범이 됐다. 그러나 아직 학계는 정확한 경판 총수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13세기 초중반 만들어졌지만,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새 경판들을 계속 추가한 탓에 후대 경판들도 대장경에 넣을지 말지를 놓고 반세기 이상 논란을 거듭해온 까닭이다. 현재 공인된 팔만대장경 경판 수는 1915년 조선총독부 관리 오다 간지로의 조사 통계인 8만1258판. 62년 국보 지정 때도 이 수치가 바탕이었다. 그러나 2000년 이래 10여년간 문화재청과 해인사, 동아대의 공동조사로 오다의 조사 때는 명확하지 않았던 후대 추가 경판 수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자 논란이 뜨거워졌다. 고려말~조선말기 글자가 닳아 없어진 옛 원판 대신 새로 깎아 넣은 보각판 82판과 1915년 오다 간지로가 만든 보각판 18판, 오다가 만든 보각판을 1937년 다시 복제한 18판 등 118판이 원래 경판에 추가로 보태진 사실이 명확하게 확인된 것이다. 논란중인 경판을 포함한 대장경 총수도 오다의 애초 조사치보다 94장 많은 8만1352판이 됐다. 이날 학술대회는 이런 최근 조사 결과를 토대로 전문가 의견을 듣고 경판 총수에 대한 합의점을 끌어내기 위한 자리였다. 기조발표를 한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1865년 해인사에서 대장경 2부를 찍을 당시 원래 고려 때 대장경목록에 없었는데도, 분류 편의상 일부러 대장경에 집어넣은 대장경주석서, 고려 승려 균여의 저술 등을 포함한 ‘보유판’ 15종 2739판을 제외해야 하며, 후대 보완해 넣은 중복 경판들도 목록에서 빼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려 한역대장경으로서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후대 끼워 넣거나 중복된 경판은 별도로 지정,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뒤이어 발표한 최영호(동아대), 김성수(청주대) 교수는 후대 경판도 신앙물로 대장경이 꾸준히 활용됐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이므로 일제시대 경판까지 대장경 목록에 넣는 게 최상이라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일제시대 보각판의 경우 총독부가 일본 황실의 안녕과 만주국 황제 푸이에 대한 선물 등의 외교 목적으로 만든 것이므로 별도 지정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는 절충안을 내놨다. 후속 토론에서는 해인사대장경연구원장 경암 스님이 모든 경판을 대장경으로 알고 수백년 예배해온 불자들의 오랜 신앙 관행도 고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팔만대장경 경판의 공인된 총량을 놓고 앞으로도 진통이 계속될 것임을 예감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2000년 이후 94판 추가 확인
그중 일제강점기때 만든 36판 등
후대에 더한 경판 인정 놓고 토론 팔만대장경은 13세기 고려인들이 몽골 침략을 맞아 호국정신 아래 역대 불교경전을 모두 모아 새긴 거대한 경판들 모음이다. 불교경전을 집대성한 경판집으로 세계 최고일 뿐 아니라 완벽한 편제로 후대 대장경 간행의 필수 전범이 됐다. 그러나 아직 학계는 정확한 경판 총수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13세기 초중반 만들어졌지만,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새 경판들을 계속 추가한 탓에 후대 경판들도 대장경에 넣을지 말지를 놓고 반세기 이상 논란을 거듭해온 까닭이다. 현재 공인된 팔만대장경 경판 수는 1915년 조선총독부 관리 오다 간지로의 조사 통계인 8만1258판. 62년 국보 지정 때도 이 수치가 바탕이었다. 그러나 2000년 이래 10여년간 문화재청과 해인사, 동아대의 공동조사로 오다의 조사 때는 명확하지 않았던 후대 추가 경판 수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자 논란이 뜨거워졌다. 고려말~조선말기 글자가 닳아 없어진 옛 원판 대신 새로 깎아 넣은 보각판 82판과 1915년 오다 간지로가 만든 보각판 18판, 오다가 만든 보각판을 1937년 다시 복제한 18판 등 118판이 원래 경판에 추가로 보태진 사실이 명확하게 확인된 것이다. 논란중인 경판을 포함한 대장경 총수도 오다의 애초 조사치보다 94장 많은 8만1352판이 됐다. 이날 학술대회는 이런 최근 조사 결과를 토대로 전문가 의견을 듣고 경판 총수에 대한 합의점을 끌어내기 위한 자리였다. 기조발표를 한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1865년 해인사에서 대장경 2부를 찍을 당시 원래 고려 때 대장경목록에 없었는데도, 분류 편의상 일부러 대장경에 집어넣은 대장경주석서, 고려 승려 균여의 저술 등을 포함한 ‘보유판’ 15종 2739판을 제외해야 하며, 후대 보완해 넣은 중복 경판들도 목록에서 빼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려 한역대장경으로서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후대 끼워 넣거나 중복된 경판은 별도로 지정,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뒤이어 발표한 최영호(동아대), 김성수(청주대) 교수는 후대 경판도 신앙물로 대장경이 꾸준히 활용됐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이므로 일제시대 경판까지 대장경 목록에 넣는 게 최상이라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일제시대 보각판의 경우 총독부가 일본 황실의 안녕과 만주국 황제 푸이에 대한 선물 등의 외교 목적으로 만든 것이므로 별도 지정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는 절충안을 내놨다. 후속 토론에서는 해인사대장경연구원장 경암 스님이 모든 경판을 대장경으로 알고 수백년 예배해온 불자들의 오랜 신앙 관행도 고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팔만대장경 경판의 공인된 총량을 놓고 앞으로도 진통이 계속될 것임을 예감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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