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실제 유서 사례. 종이를 찢어 급하고 짧게 썼다. “…가죽 재킷, 청바지, 오토바이 부츠 차림으로 묻어주오. 안녕.” 학고재 제공
죽음 앞에 남은 ‘무수한 발자국’
국내 첫 심리부검 전문가 집필
40가지 실제 사례 절박함 생생
국내 첫 심리부검 전문가 집필
40가지 실제 사례 절박함 생생
서종한/학고재·1만5000원 2008년 초겨울 제주의 한 해수욕장. 바닷가에 서 있던 차 안에서 한 중년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이긴 했지만, 경찰은 그가 세상을 저버린 이유를 구체적으로 찾으려 했다. 이 사건이 우리나라 수사 현장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적용한 ‘심리부검’ 조사였다. 그 결과, 해당 여성은 10여년 전 시동생의 강간으로 오래 심각한 고통을 겪었고, 시집과 남편의 회피 속에 결국 막다른 길을 선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내 학자가 쓴 ‘심리부검’ 관련 책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심리부검: 나는 자살한 것을 후회한다>는 약 40여건에 이르는 나라 안팎의 실제 사건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알기 쉽게 소개했다. 심리부검은 자살한 사람들의 자료를 분석하고 유가족이나 지인의 면담을 거쳐 사망자가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원인을 찾아내는 과학적 도구를 가리킨다. 자살이 맞는지, 어떤 이유로 목숨을 끊게 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1950년대 처음 미국 수사기관이 시작했고 지금은 선진국 각국에서 널리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죽음과 관련된 사망자의 의지를 알아내고, 유족들에게는 치유의 계기가 되며 사회적으로 또 다른 비극을 막는 정책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 서종한(37)씨는 심리학을 전공한 뒤 2007년 경찰청 프로파일러(범죄 분석 요원)로 활동한 자살 심리부검 전문가다. 2008년 수사기관의 공식적인 첫 심리부검을 실시한 이래 6년 동안 현장에서 수많은 자살사건을 접했고, 2000여건의 유서를 검토했다. 미국에서 심리부검 자격전문교육을 이수하고 현재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박사과정생 겸 연구원으로 있다. 책에서 밝힌 자살자의 사례들은 성폭력 피해 여성, 무연고 독거노인, 의부증 주부, 부상 퇴직 남성, 성적 수치심을 느낀 여성, 친부모에게 성적으로 학대받은 딸, 트랜스젠더, 입시에 실패한 학생, 키우던 돼지의 살처분을 도왔던 20대 축산인의 자살 등 다양하다. 연예인들의 고위험 사례, 군 의문사 등도 포함돼 있다. 특히 자살률이 높은 경찰, 소방관, 농민, 성소수자들의 경우 좀더 구체적인 정책적 접근을 강조한다. 지은이는 “트랜스젠더 자살사건을 직접 경험한 것만도 4~5개에 이르는데, 이들을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감수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청소년 자해 문제도 중요한 이슈다. 정서적 긴장과 불안을 해소하려고 신체 일부에 고통을 가하는 ‘비자살적 자해행위’는 미국 청소년의 20%가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자해는 자살로 이어질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조사조차 없다. 유서는 한국에서 열명 중 한두명 정도가 남기는 수준으로, 미국에 견줘 매우 적은 수치라고 한다. 유서를 쓸 에너지와 생각의 여유조차 없는 탓이다. 유서의 건조한 말투 또한 정신적 소진과 갈등 때문이라고 이 책은 분석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단연코 “엄마”였다. 그밖에 “오래, 남겨져, 아무도, 혼자, 힘들다” 유의 단어가 등장했다. ‘혼자’라는 고립감이 핵심이다. 책에는 자살위험 자가진단 차트, 자살 위험 체크리스트가 포함돼 있다.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가족과 대화가 단절되며, 최근 급격한 스트레스를 겪었다면 위험 신호다. 자해 및 자살을 시도하거나 친지에게 갑자기 “미안하다, 고맙다”라고 하는 등 반복적인 징후가 나타나는데도 주변인이 무심하면 예방 노력이 허사가 될 수 있다. 한국의 자살률은 10년 넘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였다. 하루 평균 40명, 작년에만 1만38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벼랑 앞에 무수한 발자국을 찍으며 ‘심리적 주저흔’을 남긴 이들의 이야기는 절망적인 한국 사회의 속살이다. 그들의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전화 인터뷰에서 지은이는 힘주어 말했다. “나 또한 유족이나 지인들을 만나 면담하는 일이 불안하고 초조하며 힘들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사망자가 목숨을 끊게 됐는지 해소돼야 비극을 멈출 수 있기에 그 절박함을 전하려 책을 썼다. 관련 부처가 공감대를 갖고 민감성 있게 자살예방책을 세워야 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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