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세월호 아이들이 말하고 시인들이 받아 적은 ‘생일시’

등록 2015-12-17 20:43수정 2015-12-18 10:03

세월호에서 숨진 단원고 학생들의 생일에 시인들이 쓴 ‘생일시’를 모은 책 <엄마. 나야.>가 출간되었다. 사진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었던 지난달 12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광장에서 희생된 아이들의 수만큼 250개 가방을 모아 놓고 퍼포먼스를 펼치는 장면.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세월호에서 숨진 단원고 학생들의 생일에 시인들이 쓴 ‘생일시’를 모은 책 <엄마. 나야.>가 출간되었다. 사진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었던 지난달 12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광장에서 희생된 아이들의 수만큼 250개 가방을 모아 놓고 퍼포먼스를 펼치는 장면.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김선우 김민정 박성우 등
시인 34명이 학생들 생일시 써
치유공간 ‘이웃’ 프로젝트 책으로
엄마. 나야.
곽수인 외 지음/난다·5500원

푸릇한 목숨들이 시커먼 바닷물 아래 수장된 뒤에도 죽은 아이의 생일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마땅히 축하와 감사의 자리여야 할 생일잔치는 애통한 그리움이 지배하는 눈물 잔치가 되고, 부모와 친구들은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이라도 죽은 아이의 말을 듣고 싶어한다. 그러나 저승과 이승의 거리가 엄연하거늘 죽은 자의 목소리를 산 자가 어찌 들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 신화 속 헤르메스라도 불러와야 가능할 이 지난한 과업을 위해 시인들이 나섰다. 시인들이 죽은 아이가 되어 생일잔치에 모인 가족과 친구들에게 인사를 전하기로 한 것이다. 세월호에서 희생된 단원고 아이들의 목소리로 시인 34명이 쓴 ‘생일시’ 프로젝트는 이렇게 생겨났다.

“‘저 정슬인데요,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은 아무리 제가 먼 길을 떠나도/ 언제나 되돌아와서 들려주고 싶은 말,/ 이 말은 아무리 제가 돌아오지 못해도/ 종이배에라도 실어서 들려주고 싶은 말.”

박정슬 학생의 목소리로 허수경 시인이 쓴 ‘‘저 정슬인데요,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에서 정슬이는 이모와 할머니·할아버지, 엄마에게 차례로 살가운 인사를 건넨 다음 친구들에게 말한다. “손 꼭 잡고/ 가자./ 당당하게./ 우리는 잃은 것이 있으니/ 이제 지켜야 할 것도 있다고 말하자./ 당당하게, 슬픔을 삼키며.”

이 시에서 보듯 생일시는 슬픔보다는 위로와 격려, 다짐의 용도로 쓰고 읽힌다. 세월호 참사 뒤 안산에 치유공간 ‘이웃’을 마련해 유가족을 돕고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혜신과 심리기획가 이명수씨 부부가 숨진 아이들의 생일에 맞추어 시 한 편씩을 시인에게 청탁하고 유족과 친구들이 모인 생일잔치에서 모두 함께 낭독하는 방식으로 헌정된다. 시인들은 사전에 유족·친지들이 숨진 학생에 대해 쓴 글과 사진 등 자료를 받아 검토하고 최대한 아이의 목소리에 가까운 시를 쓰려 노력했다.

안중근 학생의 생일시 ‘아빠 엄마, 저 중근이에요’를 쓰면서 이 프로젝트의 문을 연 김선우 시인은 “세월호의 고통에 동참하고 해원할 방법을 어떤 식으로든 찾아야 했기에 청탁이 왔을 때 무조건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시가 무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과 회의가 많아지는 시대에 나뿐만 아니라 동참한 시인들 모두 시인으로서 자기 갱신을 겪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름도 비슷한 박성호 학생의 생일시를 쓴 박성우 시인도 “평소 안 마시던 술을 마셔야 했을 정도로 아프고 힘들게 썼다”며 “그렇지만 시를 쓰고 난 뒤 성호 어머니와 여러번 문자를 주고받으며 성호를 대신해 위로해 드리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김제훈 학생의 생일시를 쓰고 이번 시집을 책으로 내기도 한 김민정 시인도 “시를 쓴 뒤 제훈이 엄마가 전화해서 ‘우리 제훈이 정말 잘 있어요?’라고 물으셔서 ‘그럼요, 완전 잘 있어요. 환해요!’라고 말씀드렸다”며 “그 전화 통화 뒤 어머니가 기운을 내서 전국을 다니며 봉사를 하시는 등 아주 좋아지셨다고 들었고 나 역시 매우 행복했다”고 말했다.

“아빠 아빠/ 나는 슬픔의 큰 홍수 뒤에 뜨는 무지개 같은 아이/ 하늘에서 제일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로 만들어줘 고마워/ 엄마 엄마/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가장 맑은 노래/ 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함께 불러줘 고마워//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유예은 학생의 목소리로 진은영 시인이 쓴 ‘그날 이후’에서)

<엄마. 나야.>에는 정끝별·김소연·박연준·임경섭 시인 등이 참여했다. 표지 그림 ‘봄소풍’의 김선두 화백과 디자이너, 외주 편집자, 인쇄소까지 두루 재능 기부를 했으며 인세 수익은 모두 다음 생일시집을 내는 데 쓰인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