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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희한한 서양 물건에 빠지면 도덕 잃는다”

등록 2015-12-17 22:13수정 2015-12-18 10:03

맨 왼쪽은 망원경의 원리를 밝힌 <원경설>에 실린 망원경 그림, 가운데는 16세기 안경과 18세기 조선에 전해진 양금, 오른쪽은 휴대용 거울과 자명종. 안경은 개인 소장, 거울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자명종은 실학박물관 소장. 휴머니스트 제공
맨 왼쪽은 망원경의 원리를 밝힌 <원경설>에 실린 망원경 그림, 가운데는 16세기 안경과 18세기 조선에 전해진 양금, 오른쪽은 휴대용 거울과 자명종. 안경은 개인 소장, 거울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자명종은 실학박물관 소장. 휴머니스트 제공
안경·망원경 등 5개 근대 물건
조선 후기 수용사 꼼꼼히 밝혀
격리된 지식사회 한계 엿보여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강명관 지음/휴머니스트·1만8000원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이 국경을 정할 때였다.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는 천리경(망원경)이 있으면 좋겠다며 조정에 보내달라 요청했지만 거절 당했다. 국경을 정하는 중요한 일에 어떻게 천리경을 믿을 수 있느냐고 조정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반면, 청나라 대표는 망원경에다 육분의(六分儀: 측정 지점의 위도와 경도를 알기 위해 천체의 고도를 측정하는 기구)까지 갖고 와서 땅을 측량해 지도를 그렸다. 결국 국경은 남이 측량한 결과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던 과거와 달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부터 1876년 개항 때까지 조선은 외부와 스스로를 분리했다.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은 이 시기 중국이나 일본을 거쳐 겨우 한반도에 들어온 안경, 망원경, 유리거울, 자명종, 양금의 조선수용사를 톺아본 책이다. 풍부한 문헌 연구와 철저한 고증으로 인정받아온 지은이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과)의 이름값답게 섬세하고 치밀하다.

먼저, 안경은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적극 수용된 물건이다. 임진왜란 전후 조선에 알려져 곧 수입된 안경은 독서인을 자처한 사족들에게 광명을 가져다주었다. 이익(1681~1763)은 <애체경명>에서 “이제 노인이 아니고 젊은이가 되었네”라며 “저 구라파 사람이야말로 하늘을 대신해 어진 일을 하였구나”라며 극찬한다.

왕 가운데서는 숙종이 처음 안경을 썼다. 영조는 눈에 맞지 않다며 까탈스럽게 안경을 썼다 벗었다 했다. 정조 또한 품질 좋은 안경을 염원했다. 정약용(1762~1836)은 눈의 수정체가 렌즈의 구실을 한다는 설명을 내놓았고 렌즈의 원리도 파악했다. 19세기가 되면 양반뿐 아니라 시전 상인, 바느질 하는 부녀자 등 서민층에까지 안경이 널리 전파됐고 서울에는 안경을 제작하는 안경방이 생겼다. 유리거울 또한 여성들의 화장술과 화가들의 자화상 제작에 도움을 주며 19세기 들어 서울에 여러 제작 공방이 생겼다.

망원경은 1630년 처음 북경에서 들어왔지만 조선 주류 학문은 어디까지나 성리학. 지식인들은 자연학마저 이기론과 음양오행론으로 풀이하려 했기에 그 원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영조는 망원경을 부숴버렸다. “대저 이런 물건은 기교한 것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도리에 비추어 볼 때 쓰지 않는 것이 옳다.” 영의정 김재로는 “성상께서 하교하신 바가 좋다”며 맞장구를 쳤다. 지은이는 이 장면을 <서경>의 ‘완물상지’(玩物喪志)와 연결시킨다. 희한한 완호물에 빠지면 도덕적 심성을 잃는다는 뜻이다. 자연학과 기술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주된 생각이었다.

조선의 학문적 위계나 이념적 배타성은 ‘지식의 격실’을 만들었다. 사족 주류 학문인 성리학은 “거룩한 텍스트”인 경전에 대한 해석을 높이고 다른 학문을 배제했다. 서울 큰 양반인 경화세족은 북경에서 한역서양서를 수입해 읽고 서구 물건을 들여와 주변에 자랑도 했지만, 그들 내부는 오랜 당쟁과 정변으로 갈등에 시달리며 격리의 길을 걸었다. 과학적 토론이 불가능했기에 새 문물은 조선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지식으로 구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실학자들을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은 서구 물건에 대한 원리를 익히고 제작하기도 했다. 누구보다 홍대용(1731~1783)의 활약상은 작지 않다. 그는 1765년 숙부 홍억을 수행하며 북경에 가 그토록 바라던 한족 지식인들과 접촉하고 이듬해에는 북경 천주교당을 방문해 독일인 선교사들을 만나 자명종과 천문 관측기기를 보여달라 누누이 청했다. 천주당에 놓인 파이프오르간을 보고 원리를 파악해 즉석에서 연주했고, 박지원(1737~1805)과 협력해 양금을 조선 음악에 맞게 조율하기도 했다.

지은이는 서양 물건을 거부하고 원리에 대해 무관심했던 조선인들의 모습을 굳이 ‘실패’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서양 과학 일부 지식을 차용한 것에 대해 엄청난 진보적 성취처럼 여기는 것도 오류라고 밝힌다. 서구 근대를 상징하는 다섯 가지 물건들을 통해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관과 과학기술사까지 샅샅이 찾아낸 지은이의 수고로움이 돋보인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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