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들의 태도는 대체로 성숙했다. 총 6차로 진행된 시민위원회에서 이들은 헌장의 내용, 조문까지 모두 스스로의 손으로 해냈다. 경인문화사 제공
한국은 물론 세계사에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2014년 8월6일, 서울시민 190명 각자에게 박원순 서울시장이 위촉장을 건넸다. 아이를 데리고 온 주부, 고3 수험생, 독일 파견 간호사 출신의 할머니, 인기 강사로 유명한 택시기사 등이 무려 10.5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추첨을 거쳐 시민위원이 되었다. 그들은 장장 127일 동안 눈부신 ‘대화의 향연’을 이어나갔다. 전문가들도 어려워하는 ‘인권’을, 비전문가들이 과연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보란 듯이 해소시키며 시민들은 인권헌장을 완성했다. 격렬하게 논쟁했고, 공감하며 눈물지은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참여 민주주의의 전형이자 숙의 민주주의의 표본”이라고 칭찬받은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그러나 시장의 입을 통해 공식 선포되지 못했다.
시장이 위촉한 시민위원 190명
격렬히 논쟁하고 공감하며 완성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 빌미
정족수 문제 삼아 선포 거부
전문·제정과정·무산경위 담아
시민들이 스스로 만들고 선언한 <서울시민 인권헌장>(문경란·홍성수 편, 경인문화사)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서울대 법학연구소 공익인권법센터가 펴내는 ‘공익과인권’ 시리즈 25권이다. 집필자는 인권헌장 제정에 참여한 시민위원과 전문위원들. ‘서울시민 인권헌장’의 제정 과정, 세부 쟁점, 구성체계와 특징, 시민참여의 의의를 한데 담았다.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과 선포 무산 경위, 서울시의 태도 변화까지 빠짐없이 수록했다. 우리 인권이 처한 현주소를 알려주는 집단 기억의 기록이자 ‘백서’다.
발간사에서 안경환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 위원장은 이 헌장이 “시민의 권리이자 시정부의 책무”라고 전제한 뒤, 비록 공식 선포되지는 못했지만 “시민의 이름으로 제정된 엄연한 역사의 문서”라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토론 과정 자체가 ‘참여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역사이자 ‘민주 교육’이 이뤄지는 현장이었다. 모래시계로 발언 시간을 제한하고, 발언 기회는 한사람당 3번으로 규정해 발언권 독점을 막았다. 시민위원회가 거듭되며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을 놓고 가끔 인신공격이나 혐오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논란이 된 차별금지 조항 때문에 동성애 반대 세력이 공청회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지만 끝내 인권헌장은 제6차 시민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되었다.
이 헌장이 공식 선포되지 못한 건 서울시가 ‘사회적 논란’이 된다는 이유로 전원합의를 요구하고 정족수를 문제삼으며 사실상 거부했기 때문이다. ‘논란’이 된 제1장 일반원칙 제4조는 “서울시민은 (…)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 등 헌법과 법률이 금지하는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 전문위원인 염형국 공감 변호사는 “개인의 성적 지향은 (…) ‘지지’ 혹은 ‘반대’할 사항이 될 수 없다”고 책에서 밝혔다. 타고난 특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은 ‘인권 원칙’이지 합의사항이 아니며, 이는 우리 법률과 국제인권규약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권리라는 것이다. 서울시 쪽이 인권헌장 공청회에서 벌어진 불법폭력을 방치하고, 적법하게 의결·확정된 조항들에 대해 ‘전원합의 방식’을 갑자기 요구하며 의사진행을 방해한 것에 대해서도 이 책은 책임을 묻는다.
인권헌장 제정 과정을 집필한 문경란 서울시 인권위원회 위원장(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 부위원장)은 “(선포 무산 뒤) 시민들은 자신들이 과연 서울시의 진정한 주인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었고 자괴감과 혼란을 겪어야 했다”면서도 “시민들이 헌장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이는 여전히 숨 쉬며 살아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인권사상사>를 저술한 미셸린 이샤이의 말대로 “인권의 역사는 폭풍이 인정사정없이 휘몰고 지나간 폐허를 몇 개 남지 않은 등불에 의지해 사방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역정”이라는 것이다.
23일 오후 서울시엔피오지원센터에서는 시민위원과 전문위원 등이 참석하는 책 출간 축하 모임이 열린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격렬히 논쟁하고 공감하며 완성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 빌미
정족수 문제 삼아 선포 거부
전문·제정과정·무산경위 담아
서울시민 인권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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