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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가난이라는 무서운 ‘유전병’

등록 2015-12-31 20:24

잠깐독서
소각의 여왕
이유 지음/문학동네·1만2000원

여왕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고물상을 경영하는 아버지 지창씨는 파지를 모으고 냄비 더미를 만들며 냉장고를 분해해서 돈으로 바꾼다. 그 딸인 해미는 아예 버려진 것들은 말끔히 태우고 없애는 달인이 됐다.

소설 <소각의 여왕>에서 아버지는 딸을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끌고 다니면서 고철 보는 눈을 키우고 피복 벗기는 법을 가르칠 때 허파에 바람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단단히 타일렀다. 반짝이는 것에 집착한 할아버지, 휴대폰에서 값나가는 금속을 빼내는 꿈에 빠진 아버지로 이어지는 유전병이 있단다. 그러나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딸로 이어지는 가난의 대물림이야말로 지독한 유전병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나가떨어질 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 지창씨가 아무리 굴려도 다시 돌아오는 생활의 바윗돌을 굴리길 포기하자 딸이 직접 돈을 벌기 위해 나선다. 남아도는 쓰레기만 고물상으로 흘러 들어오는 게 아니다. 노동력을 잃고 폐지만 줍고 사는 노인, 이름까지 사기 냄새가 나는 친구 정우성, 죽을 만큼 얻어맞은 개 등 생산과 소비의 톱니바퀴에서 매끄럽게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과 물건들을 처리하는 역할을 떠맡은 해미는 진정한 ‘소각의 여왕’이다.

그러나 ‘빈곤 소설’에 이토록 씩씩한 여주인공이 있었을까. 유품정리사라는 험하지만 돈 되는 직업을 택한 해미는 죽은 사람이 남긴 물건을 태우고 돈 되는 것을 빼돌린 다음 사람이 죽은 자리를 케이크 상자처럼 말끔하게 치운다. 책 자체가 소각의 방식으로 쓰인 듯도 하다. 책은 도시의 맨 밑바닥, 죽음과 맞닿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간결, 명확하게 묘사할 뿐 비유나 관념 따위를 남기는 법이 없다. 읽는 사람들이 가지게 될 감정을 말끔히 태워버린다.

2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인 책은 2010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낯선 아내’가 당선되어 등단한 소설가 이유의 장편소설이다. 210쪽짜리 책에 이만한 삶의 무게를 싣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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