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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삶의 마지막에 떠오른 모든 생각이 고마운 생각이길”

등록 2016-01-07 20:56수정 2016-01-08 10:08

2010년 작가와 예술가들을 위한 시설인 미국 뉴욕주 블루마운틴센터에서 글을 쓰고 있는 올리버 색스.  사진 알마 제공
2010년 작가와 예술가들을 위한 시설인 미국 뉴욕주 블루마운틴센터에서 글을 쓰고 있는 올리버 색스. 사진 알마 제공
암으로 작고하기 전 완성한 자서전
‘병례사’ 저술 왜 시작하게 됐는지
유쾌한 필치로 돌아본 팔십 평생

성취와 업적 앞세우는 세태와 달리
마약·동성애 경험도 진솔하게 담아
감사의 온기로 따스한 마침표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알마·2만2000원

역시 그는 자화자찬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거의 틀림없이, 노벨의학상을 탄 어느 누구보다도 더 저명한 의사였던 올리버 색스(1933~2015)는 암으로 작고하기 4개월 전인 지난해 4월 이런 고해까지를 담은 두툼한 자서전을 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UCLA의 환자들에게 헌신했다. 그러나 모터사이클을 타지 않는 주말이면 가상 여행(대마초나 나팔꽃씨나 LSD로 떠나는 마약 여행)에 몰두했다. (…) 어느 날 한 친구가 ‘특별한’ 대마초라면서 한 대 주었다. 보통 대마초로는 절대 느끼지 못할 효과였다. 오르가슴에 가까운 너무나 강렬하고 음탕한 기분 말이다. (…) 내가 아는 것은 그날 밤 암페타민을 흠뻑 적신 대마초 한 대로 앞으로 4년을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친구인 시인 톰 건의 시 ‘온 더 무브’에서 제목을 따온 이 책에서 그는 어쩌면 평범한 의사일 수 있었던 자신이 왜, 어떻게 작가의 길로 이끌리게 되었는지를 정담을 나누듯 털어놓는다. 비탄에 잠기거나 절망에 빠질 법한 생의 막다른 길에서도 그는 자신의 ‘몽블랑’을 가볍고 유쾌하게 움직여 진솔하면서도 온기로 가득한 회고록을 완성해냈다. 거기엔 자신이 이룬 직업적·지적 성취만이 아니라 마약 투약의 경험과 동성애 편력, 직업적 오판과 치명적 실수 같은, 은글슬쩍 가리고 싶었을 기억까지도 재현돼 있다.

리걸 페이퍼에 몽블랑 만년필로 꾹꾹 눌러쓴 메모. 사진 알마 제공
리걸 페이퍼에 몽블랑 만년필로 꾹꾹 눌러쓴 메모. 사진 알마 제공

‘주중 의사-주말 마약중독자’라는 ‘이중생활’은 애초 남자 파트너와 헤어진 뒤 보상 차원에서 시작한 일탈이었지만, 뜻밖에 창조적 다짐으로 귀결된다. “1967년 2월에 한 번 더 약에 취해 조증 상태가 되었다. 이번의 황홀경은 창조적인 쪽으로 향해, 내가 해야 할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보여주었다. 편두통에 관한 제대로 된 책을 쓰고 어쩌면 그 다음으로 다른 책들도 써보자고.” 그길로 그는 암페타민을 끊었다. 올리버 색스라는 작가의 이름을 최초로 알린 저작 <편두통>(1970)은 이런 곡절 끝에 세상에 나왔다.

부모, 삼촌, 형에다 사촌 셋까지가 의사인 집안에서 자라 옥스퍼드 의대를 나온 그는 그냥 의사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에 징집되길 원치 않은데다 영국 특유의 계급적 완고함 혹은 불통에 거부감을 가졌던 터라 캐나다를 거쳐 좀 더 자유로워 보이는 미국으로 향한다. 거기서 모터사이클에 심취한 레지던트로, 역도에 매료된 신경과 의사로 지내는 동안 그는 기존 이론으로는 진단도 처방도 어려운 환자들을 만나게 된다. 마약에 빠져 든 것도 이 무렵이다. “나는 직업이 신경의라는 이유로 모든 종류의 뇌 상태, 정신 상태에 관심이 있지만 무엇보다 약물이 유발하는 또는 약물로 조절된 뇌와 정신의 상태가 궁금했다.”

1961년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새로 구한 모터사이클 BMW R60에 앉은 모습. 사진 알마 제공
1961년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새로 구한 모터사이클 BMW R60에 앉은 모습. 사진 알마 제공

그리고 서른 다섯이 되던 1968년, 자신의 인생행로를 바꿔놓을 한 권의 책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소련의 신경심리학자 루리야(1902~1977)의 저작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를 읽은 것이다. “(루리야의 책은) 내가 읽어본 어떤 것보다 심오하고 상세한 병례사(病例史)였다. (…) 이 저서는 내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바꾸어 내가 쓴 모든 책의 원형이 되었다.” 의대생이던 10년 전 런던 강연에서 “경이로운 관찰력과 이론적 깊이에 인간적 온기까지 한 데 결합된 계시와도 같은 경험을 주었던” 그 루리야였다.

그러나 색스를 만든 것은 결국 색스 자신이었다. 수많은 의사들이 그저 난치병의 하나로 보아 넘겼을 뇌염후증후군(수면증) 환자들의 증상과 살아남기 위한 분투를 그는 <깨어남>―훗날 <사랑의 기적>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의 영화로 국내에도 소개된―에 썼고,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통해서는 의미가 제거된 지각 또는 착각 증상을 앓는 실인증 환자들의 실상을 알렸다. 대다수 의사들은 침묵으로 질시를 표현했지만, 세상은 그런 환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나는 내가 다룬 병례들이 ‘전형적인 사례’라고 보았다. 다만 이례적인 중증 사례를 기술함으로써 신경계 이상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랐다. 더불어 뇌의 구조와 작용에서 중대한 측면, 어쩌면 뜻밖의 측면이 뚜렷이 밝혀지기를 희망했다.”

색스에게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는 상찬을 안겨준 저작들은 뛰어난 필력 못지 않게 예민한 관찰과 철저한 기록의 소산이기도 했다. 열 네살 이후 1000여권의 일기를 쓴 색스는 그만한 분량의 임상일지도 별도로 갖고 있었다. 그는 아무 곳에서나, 심지어 달리는 트럭 위에서도 생각이 떠오르면 끄적이는 메모광이었다. 또한 그는 착상의 여유와 몸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수영을 평생 좋아했고, 모차르트의 <미사 C단조>와 <레퀴엠>을 듣고 또 들었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손에 들려 있던 몽블랑을 사랑했고, 관절이 더 이상 버텨주지 못할 때까지 피아노를 쳤다.

색스는 열 세번째 저작인 이 책에서 “나 자신의 전기에세이집을 쓰고 싶다”고 했던 열 여덟, 대학 1학년 때의 그 푸릇한 생각을 여든 한살에 비로소 실천에 옮겼다. 그러면서 그 자신의 팔십 평생 ‘온 더 무브’를 가능하게 해준 모든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 감사의 헌사를 건네고 있다. 늘 되뇌곤 했던 “삶의 마지막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고마운 생각이게 하라”는 위스턴 휴 오든의 시구처럼.

아흔이 넘어서도 왕진을 다녔던 아버지, 왼손 몰래 오른손이 해야 할 일을 했던 어머니는 삶과 직업적 소명뿐 아니라 이야기꾼의 자질도 물려줬다. 늘 ‘열렬하게’ 그의 편이 되어준 레니 이모, 수줍은 완벽주의자 색스가 원고를 고치고 또 고치며 출판을 주저할 때 결단으로 길을 열어준 편집자 콜린 헤이크래프트, 대학 때 만난 평생지기 에릭 콘과 조너선 밀러, 영감의 원천이 되어준 톰 건, 이 자서전을 바친 ‘마지막 사랑’ 빌리 헤이스 그리고 이 책에서 언급하지 못한 그 많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색스가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암 발병 사실을 알린 지난해 2월19일치 <뉴욕타임스> 기고문에도 이렇게 적었다. “두렵지 않다고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가장 큽니다. 나는 사랑했고 또 사랑받았습니다. 많은 것을 받았고, 일부는 되돌려주었습니다. (…) 무엇보다도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의식 있는 존재, 생각하는 동물로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 자체가 내게는 크나 큰 특권이자 모험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뜬 뒤에 나온 열 네번째 책의 제목 또한 <그래티튜드>(Gratitude), 감사였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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