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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열차는 오지 않는다네

등록 2016-01-21 20:04수정 2016-01-21 20:04

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새로운 빈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천지인(2010)

정거장에 한 무리가 서성대고 있다. 대학을 마치고도 몇 년째 취직 공부를 하는 청년, 평생 계약직으로만 옮겨 다닌 가장, ‘명퇴’를 당한 뒤 놀고 있는 중년들이다. 이들이 목 빼고 기다리는 것은 한때 ‘복지국가’라 불렸던 열차. 정규직, 평생직장, 든든한 노조,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정부가 있는 땅으로 가는 열차. 열차는 오지 않고 어디선가 이 철로는 오래전 폐쇄됐을 거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온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가 경제입법안을 뭉개고 있어 수십만 개의 일자리가 날아간다며 길거리에 나가 서명까지 했다. 정말 그런 걸까? 호도일 것이다. 이 정부는 매년 2조원 가까운 예산을 청년 일자리 사업에 투입했다. 그러고도 지난해 새로 생긴 청년 일자리가 비정규직 포함해 7만개에 미치지 못한다. 일자리당 3천만원의 예산이 든 셈이니 그냥 나눠주는 게 나을 뻔했다.

실업과 불안정한 일자리, 임금 삭감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뉴노멀’(새로운 보편)일지 모른다. 경영학에서 혁신은 인력 감축과 동의어가 된 지 오래다. 생산직 일자리는 저개발국가로 넘어간다. 수십억명이 아직도 20만~30만원의 월급에 기꺼이 일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럼 사무직은? 올해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나온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를 보면, 로봇, 인공지능 등이 이끄는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앞으로 5년 안에 선진국에서 사무·관리직종을 중심으로 5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한다.

복지국가에 대한 그리움은 ‘소득주도 성장’도 있지 않으냐는 ‘애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새로운 빈곤>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실 2차 대전 후 자본주의 황금기를 노래한 복지국가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접점에서 합의된 ‘일시적’인 것이었다. 자본으로서는 생산에 투입해야 하는 인력이 부족했고, 노동윤리를 갖춘 양질의 노동력을 대규모로 재교육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역할을 정부가 담당했다.

그 뒤 세상은 달라졌다. 기술의 발달이든 세계화 덕분이든 “오랜 세월의 노동이 축적한 어마어마한 능력 덕택에 수많은 구성원들의 개입 없이도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할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 사회의 엔진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인데 “생산자의 사회에서 소비자의 사회로, 노동윤리의 사회에서 소비의 미학이 지배하는 사회”로 탈바꿈한 것이다. 과거 노동윤리와 원형감옥형 네트워크, 국가 주도의 강제와 훈련이 담당하던 “규범과 사회적 규제 일반에 대한 복종”은 이제 “상품 시장의 유혹과 부추김을 통해 확보”된다.

복지에 대한 합의가 있을 때 실업자나 빈곤층은 ‘산업노동력’으로 불렸지만 소비의 시대에 이들은 “결함 있는 소비자”로 다시 정의된다. 자본이 이들의 복귀에 관심을 기울이고, 돈을 쓸 이유는 없다.

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어느새 “잉여”로 불리게 된 이들에겐 쓸모있는 사회적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점점 그들 자신의 눈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조 등 처지를 개선하려는 정치적 움직임도 미약한 것이다.

날은 점점 어두워가는데 열차는 정말 오지 않는 것일까?

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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