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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헌법은 구시대의 이상 담은 연못이 아니다”

등록 2016-01-21 20:27수정 2016-01-22 10:17

윌리엄 더글러스는 대법관 재임 초기 부통령이나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여러 차례 샀고, 외부 재단에서 급여를 받은 일 등으로 모두 네 차례나 탄핵 위기를 맞기도 했다. 대법관 재직 당시 집무실에서 사진 촬영에 응한 윌리엄 더글러스. 
 <한겨레> 자료사진
윌리엄 더글러스는 대법관 재임 초기 부통령이나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여러 차례 샀고, 외부 재단에서 급여를 받은 일 등으로 모두 네 차례나 탄핵 위기를 맞기도 했다. 대법관 재직 당시 집무실에서 사진 촬영에 응한 윌리엄 더글러스. <한겨레> 자료사진
36년 재직·반대의견 300여건
‘위대한 반대자’ 더글러스 통해
미 대법원 ‘사법적극주의’ 탐구

논리·사변보다 직관·통찰 의존
이혼과 결혼 여러 차례 반복한
인간적 약점과 한계도 짚어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
-위대한 이름 불행한 인간

안경환 지음/라이프맵·2만2000원

“법이란 말장난의 과학”이라는 어느 아일랜드 배우의 조소는, 그래도 약과다. 그 자신 대법관이었던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 법률가는 아예 없다고 했고, 성경의 누가복음은 “너희 율법 교사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라는 점잖지만 섬뜩한 경고를 남기고 있다. 가장 강렬한 저주는 셰익스피어한테서 나왔다. “첫번째로 할 일은 모든 법률가를 죽이는 것이다.”(<헨리6세>)

고래로, 법률가는 환영받지 못했다. 법관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대체로 권력자와 부자들의 편이라는 ‘혐의’를 받아왔다. 특히 “헌법이란 법관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찰스 휴스 전 미국 대법원장)이라고 할 정도로 막강한 헌법 해석권을 행사하는 미국의 연방대법관들은 흔히 ‘아홉 현인’으로 불리지만, 기성 사회질서를 온존시키는 ‘아홉 늙은이들’이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윌리엄 더글러스(1898~1980)는 어느 범주에 속하는 인물일까. 남겨진 판결문은 취임선서를 한 1939년 4월17일부터 36년 7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가 어떤 대법관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닉슨이 집권하고 있던 1972년 육군정보부대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반전운동가들을 광범위하게 사찰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헌법 수정 제1조 위반으로 민사소송이 제기됐다. 원고들은 군의 감시행위가 ‘연방 의회는 (…) 언론, 출판의 자유나 국민이 평화롭게 집회를 열 수 있는 권리 및 불만의 시정을 정부에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그 어떤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고 한, 1791년 ‘권리장전’의 첫 조항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에서는 사찰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아니라 제3자인 이들 단체에 ‘원고 적격’(standing·당사자 적격)이 있는가를 놓고 논전이 벌어졌다.

더글러스의 의견이다. “이 사건은 우리 몸의 암과 같은 존재를 다룬다. 군의 감시행위는 수정 제1조에 대한 전쟁행위다. (…) 권리장전은 정부의 감시를 받지 않고 신앙과 표현,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추가되었다. 육군의 감시만큼 우리 제도의 목적과 취지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는 없다.”

같은 글에서 더글러스는 “헌법은 ‘정부를 국민의 몸에서 떼어내기 위해’ 제정된 것”이라고 선언한다. 헌법은 막강한 정부에 맞서 국민 개개인의 인권을 온전히 보장하기 위한 최적의 합의이자 최고의 가치다. 그러나 헌법은 경전이 아니다. “헌법은 시대의 영고성쇠를 순간순간 반영하는 살아 있는 문서이지, 이미 썩어 온갖 잡충이 들끓는 구시대의 이상을 담은 연못이 아니다.”

그런 소신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비전시에 간첩죄가 인정돼 사형 판결을 받은 로젠버그 부부의 형집행을 중지시킨 결정, 가난해 소득세를 내지 못한 사람의 투표권을 몰수하거나 백인에게만 예비투표권을 부여한 주법은 위헌이라는 판단, “공산주의자는 그들의 반사회적 ‘행동’ 때문에 기소될 수 있으나 세상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공표’했다고 해서 기소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의견으로 나타났다.

더글러스는 법전에 새겨진 문언의 경계를 넘지 않기로 작정하고 “선판례의 면전에서 겸손”한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법소극주의’(사법자제론)를 경멸 대상으로 삼았다. 국가의 기능 수행이라는 ‘법익’,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헌법정신’을 심판의 저울에 나란히 올리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본 것이다. 상반된 이 두 가치가 충돌하는 사건들에서 국가가 법익의 최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개인의 기본권이 침해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약자의 대변인’으로 불린 루이스 브랜다이스의 자리와 함께 ‘사법적극주의자’의 정신까지 승계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갔다. 52년 ‘폴락’ 판결에 이어 65년 ‘그리스월드’ 판결을 통해 그는 헌법에 없는 ‘프라이버시권’을 창안해냈다.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권리도 보호되어야 한다.” 72년 시에라클럽 사건 판결 반대의견에서는 기왕 원고 적격을 인정받은 ‘법인’과 마찬가지로 “산과 들, 물과 바람 같은 환경보호 대상물은 스스로의 보전을 위해 개발 계획에 대해 법적 구제를 신청할 (원고) 적격이 있다”고 썼다.

그렇다고 그 긴 세월에 걸쳐 반대의견만 개진한 것은 아니다. 주의 경계를 넘어 이동할 자유 인정(58년), 화이트칼라의 횡령은 배제한 채 단순 절도범만 거세로 처벌하던 주법 위헌(42년), 극빈 형사 피고인에게 국선변호인 선임(63년), 출생지(48년)·혼인 중 출생 여부(68년)·국적(71년)을 이유로 차별하는 ‘의심의 대상이 되는 분류’ 철폐 등에서 더글러스는 다수의견을 주도했다.

미국 수도 워싱턴 디시에 있는 연방대법원 청사. ‘법의 수호자’상 뒤편으로 여덟개의 둥근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정면 한가운데 ‘법 아래 공평한 정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미국 수도 워싱턴 디시에 있는 연방대법원 청사. ‘법의 수호자’상 뒤편으로 여덟개의 둥근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정면 한가운데 ‘법 아래 공평한 정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럼에도 더글러스는, ‘후배’ 대법관 해리 블랙먼의 말처럼 ‘외로운’ 반대자로 기억된다. 당대와 불화하고 시대를 앞서가며 그는 연방대법원 역사상 가장 많은, 300건이 넘는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그로 인해 얻게 된 ‘위대한 반대자’(Great Dissenter)라는 별칭에는 대체로 용감하고 때때로 무모했던 이 ‘극단적 사법적극주의자’의 36년이 압축돼 있다.

그를 평생의 화두로 붙들고 있던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책<윌리엄 더글라스 평전>을 통해 미국 서쪽 끝 워싱턴주의 인디언 마을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단돈 6센트를 들고 뉴욕에 도착한 애송이 청년이 진보적 대법관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까지 전 생애를 공들여 재구성했다. 책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그의 사법관, 특히 사법적극주의자의 긍정적 면모를 드러내는 데 상당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직관과 통찰을 사변과 논리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동료 대법관들을 설득하기보다 혼자 저지르는 ‘아웃사이더’로 만족했으며, 세번의 이혼과 네번의 결혼으로 가까운 사람들을 실망시킨 더글러스의 인간적 한계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균형감으로 평전의 약점을 극복했다.

더글러스가 보여준 사법적극주의의 역할과 한계는 무엇일까? 이 책은 해답을 제시하지 않지만, 텍스트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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