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독서
애인의 애인에게
백영옥 지음/예담·1만3000원 “내 운명선을 그의 뾰족한 혀끝이 집요하게 핥”는다면, 그는 애인이다. 내 팔자에 나 아닌 존재가 축축하게, 그러니까 무겁게 포개질 때 삶은 홀연히 초유의 것이 되고, 사랑하기 전에 통짜이던 감각은 애인을 만나면 분열한다. 상냥한 키스의 장소인 손등 바로 아래, 성냥 같은 피부가 있어 몸에 불이 붙을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건 애인뿐이다. 사랑받을 자격도 없고 방법도 모르는 삶에, 웬 인센티브처럼 찾아오는 사랑. 그것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연애는 생명이니까. 4년 만에 나온 백영옥의 장편소설 <애인의 애인에게>는 네 인물로 이 풍경을 채운다. 세 여자와 조성주란 남자. 세 여자의 시점으로 3부가 각각 쓰였다. 사랑이 병사했다. 이혼을 앞두고 이별여행을 떠나는 마리와 성주. 사랑이 태어났다. 성주를 혼자 좋아하고 성주와 마리가 부재하는 동안 집을 빌려 쓰게 된 정인. 그리고 기혼인 성주가 사랑한 기혼의 수영. “조금도 부딪히지 않고 빗겨나가”기만 하는 이들의 사랑은 무표정하다. 다 다르게 사랑하지만, 그 점에선 같다. 그런데 “무표정은 존재하지 않는 표정이 아니다. 어떤 것들은 넘쳐야 비워진다. 무표정은 감정들이 넘쳐흘러 비로소 비워진 얼굴의 단면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넘칠 만큼 충만했던 모든 사랑의 후천적 무표정을 쓴다. 인물들은 연애할 때 마음을 건다, 마음. 인생 같은 거창한 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결혼도 그렇다. 인생을 걸기보단 (아플 것이 확실한) 마음을 길게 지키는 일. “저 사람이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온갖 고통을 주게 될 텐데, 그 사람이 주는 다양한 고통과 상처를 참아낼 수 있는지, 그런 고통을 참아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 그것으로 무슨 행복이 아니라 “최소한 덜 불행”해지는 길. 마지막 화자 수영은 끝에 천문대를 찾는다. 우주의 손금 같은 별자리. “머무는 건 없어요. 제자리인 것 같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거든요. 별의 좌표도 계속 바뀌거든요. 그러니까 우린 전부 다 지나가는 중인 겁니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백영옥 지음/예담·1만3000원 “내 운명선을 그의 뾰족한 혀끝이 집요하게 핥”는다면, 그는 애인이다. 내 팔자에 나 아닌 존재가 축축하게, 그러니까 무겁게 포개질 때 삶은 홀연히 초유의 것이 되고, 사랑하기 전에 통짜이던 감각은 애인을 만나면 분열한다. 상냥한 키스의 장소인 손등 바로 아래, 성냥 같은 피부가 있어 몸에 불이 붙을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건 애인뿐이다. 사랑받을 자격도 없고 방법도 모르는 삶에, 웬 인센티브처럼 찾아오는 사랑. 그것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연애는 생명이니까. 4년 만에 나온 백영옥의 장편소설 <애인의 애인에게>는 네 인물로 이 풍경을 채운다. 세 여자와 조성주란 남자. 세 여자의 시점으로 3부가 각각 쓰였다. 사랑이 병사했다. 이혼을 앞두고 이별여행을 떠나는 마리와 성주. 사랑이 태어났다. 성주를 혼자 좋아하고 성주와 마리가 부재하는 동안 집을 빌려 쓰게 된 정인. 그리고 기혼인 성주가 사랑한 기혼의 수영. “조금도 부딪히지 않고 빗겨나가”기만 하는 이들의 사랑은 무표정하다. 다 다르게 사랑하지만, 그 점에선 같다. 그런데 “무표정은 존재하지 않는 표정이 아니다. 어떤 것들은 넘쳐야 비워진다. 무표정은 감정들이 넘쳐흘러 비로소 비워진 얼굴의 단면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넘칠 만큼 충만했던 모든 사랑의 후천적 무표정을 쓴다. 인물들은 연애할 때 마음을 건다, 마음. 인생 같은 거창한 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결혼도 그렇다. 인생을 걸기보단 (아플 것이 확실한) 마음을 길게 지키는 일. “저 사람이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온갖 고통을 주게 될 텐데, 그 사람이 주는 다양한 고통과 상처를 참아낼 수 있는지, 그런 고통을 참아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 그것으로 무슨 행복이 아니라 “최소한 덜 불행”해지는 길. 마지막 화자 수영은 끝에 천문대를 찾는다. 우주의 손금 같은 별자리. “머무는 건 없어요. 제자리인 것 같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거든요. 별의 좌표도 계속 바뀌거든요. 그러니까 우린 전부 다 지나가는 중인 겁니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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