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9월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자화상: 고갱에게 헌정>. 고갱은 당시 파리 화단에서 극찬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빈센트는 이에 휘청거렸다. 민음사 제공
‘비운의 천재화가’ 반 고흐
기존 관념 전복하며 재구성
15년 엄정한 연구력 바탕
19세기 유럽 문화사 ‘총체’
생애와 가족사·사회상 분석
고흐 평전 ‘모범 답안’ 제시
기존 관념 전복하며 재구성
15년 엄정한 연구력 바탕
19세기 유럽 문화사 ‘총체’
생애와 가족사·사회상 분석
고흐 평전 ‘모범 답안’ 제시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스티븐 네이페 지음
최준영 옮김/민음사·4만5000원 1890년 7월27일,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파리에서 32㎞쯤 떨어진 오베르 또는 그 부근에서 총상을 입었다. 당시 머물던 여관에서 화구를 챙겨 나간 지 대여섯시간 만에 그는 구멍 뚫린 배를 움켜쥐고 돌아왔다. 빈센트는 파이프 담배를 피울 정도로 의식이 또렷했고, 몸에 박힌 총알을 꺼내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서른시간쯤 지난 뒤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1934년, 미국 작가 어빙 스톤(1903~1989)은 고흐의 첫 전기소설 <삶에 대한 욕망> (Lust for Life)을 썼다. 이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네덜란드 출신 한 무명작가에게 “영원성”을 부여했다. 특히나 밀밭에서의 자살 사건은 ‘비운의 천재화가’다운 비극적 결말을 완성했다. 1953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고흐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으며 그로부터 3년 뒤 스톤의 책을 각색한 영화 <열정의 랩소디>(빈센트 미넬리 감독, 1956)가 아카데미상을 받아 고흐의 폭풍 같은 삶은 “영원히 신화 속에 봉해졌다”. 어빙 스톤의 책은 2000년 우리나라에서 시인 최승자가 우리말로 옮겨 출간되었다.(<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2007년 재출간)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Van Gogh: The Life, 2011)는 어빙 스톤이 부여한 ‘영원성’을 70년 만에 벗겨내 ‘신화’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다. 집필자는 전기작가 스티븐 네이페(1952~)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1951~2014). 두 사람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법학도 출신답게 사실관계를 꼼꼼히 밝혀내는 전기작가로 명성이 높다. 이들이 함께 쓴 <잭슨 폴록: 미국의 전설>은 1991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15년 동안 빈센트를 연구하면서 유화 900점, 서간 2000여통을 비롯한 방대한 자료를 검토했고, 그 결과 고흐의 가족사뿐 아니라 애인들의 생애사에 이르기까지 놀랄 만큼 집요하게 ‘사실’을 복원할 수 있었다. 국립국어원의 원칙상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어 표기법을 적용받지 않는 예외 사례이지만, 이 책은 일관되게 ‘핀센트 판 호흐’로 호명한다. 네덜란드어 발음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고흐에 대한 선입관을 전복하려는 의미로, 그의 이름을 낯설게 하려는 언어적 효과를 노렸다. 이 책은 고흐의 죽음조차 그가 스스로 선택했던 것인지, 아니면 평소 이 화가를 괴롭히던 부유층 10대 자녀의 우발적 격발 때문이었는지 판단을 유보한다. 종합하면, 그의 자살은 입증되지 않았다. 고흐의 집안은 양가 모두 중산계층이었다. 모계 쪽 혈통에는 정신병, 간질환자, 자살자가 있었고 어머니 아나는 이 때문에 어두운 인생관을 얻었다. 목사인 아버지 쪽 집안은 예술가와 성직자, 화상을 두루 배출한 명문가로 부르주아적 가치를 숭상했다. 어머니 아나는 속물 근성이 있었고 체면을 중시했다. 아이들을 엄하게 훈육했고, 아들에게 ‘교양 미술’을 가르쳤다. 19세기 중반 유럽에는 훗날 역사가들이 “가족 전체주의”라고 일컬을 정도로 “가족적으로 단결하라”는 담론이 흘러넘쳤다. 바깥 세계는 위험하며 가정이야말로 궁극의 피난처라는 내용이었다. 아나는 이에 영향 받아 아이들에게 자식의 의무를 냉정하게 강조했다. 빈센트는 평생 그런 어머니에게 집착했다. 목사였던 아버지 테오도뤼스는 큰아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그를 강하게 심판했다. “핀센트는 절망적으로 아버지와 하느님을 혼동했으며, 그 어느 쪽에서도 용서를 찾지 못했다.” 부자간의 불화가 너무 심각해 빈센트의 누이동생은 “큰오빠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했을 정도였다. 빈센트는 부모와 동생 테오에게 평생 후원을 받았고 제 밥벌이를 하지 못한다는 아버지와 친척들의 책망에 시달렸다. 친지들은 세속적이었고, 가족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난 빈센트는 어릴 때부터 황야를 떠돌며 새나 곤충을 관찰했다. 자연은 외롭고 쓸쓸한 그를 위로하는 한편, 가족들에게 외면당한 소외감을 환기시켰다. 열여섯살에 백부가 경영하는 유명한 화랑에서 일하게 된 빈센트는 미술에 열의 넘치는 관심을 보이며 작품들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해고당했고, 성직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지만 이 또한 헛된 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에게 미술과 종교는 구원이요 빛이요 희망이었다. 빈센트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일부러 헐벗었고, 땅바닥에서 잠을 잤으며, 미술을 포기할 정도로 세속을 거부했다. 보리나주 광산 지역을 찾아 교리 문답 교사로 일하며 가난하고 불쌍한 피조물들과 함께하려 했지만 이 또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투쟁적인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앞장섰던 광부들은 ‘저항보다 고통’, ‘슬픔 속에 기뻐하라’고 설교하는 화가의 환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80년께부터 빈센트는 생활비를 벌겠다는 “확고한 결의 아래” 격렬한 도전을 거듭했다. 색채를 캔버스에 내던지며 실험했고, 삽질하듯 물감을 끼얹었다. 기교보다 표현임을 믿었고 습작을 거듭하며 ‘씨 뿌리는 사람’을 거듭 그렸다. “인생은 파종일 뿐”이라던 그는 추수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의 두꺼운 유화는 대중의 거부반응을 불러일으켰고 큰 화상이 된 동생 테오에게 빈센트는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했다. 고흐는 사실 ‘가정’을 열렬히 원했다. 그의 모델이자 애인이었던 신 호르닉에게는 다정한 가장이었고, 함께 살 아파트를 열광적으로 꾸몄다. 고갱과 함께 ‘예술적 가정’을 만들려고 할 때도 가구를 들여놓으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함께 사는 동안 광기 어린 고흐에게 학을 뗀 고갱은 적대적으로 돌아서서 이죽거렸다. 고갱은 떠났고, 성탄절 이틀 전 동생 테오의 청혼 소식을 들은 뒤 고흐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제 귀를 잘랐다. 고흐는 알려진 것처럼 평생 주목받지 못한 작가는 아니었다. 죽기 한해 전인 1889년, 알베르 오리에라는 젊은 미술 비평가가 광기의 천재 작가로서 고흐를 극찬했다. 이에 고무된 것도 잠시, 고흐는 성공적인 비평에서 끔찍한 심판과 형벌의 두려움을 느꼈다. ‘해가 나면 곧 비가 온다’는 건 어머니가 가르친 인생관이었다. 빈센트가 화가로서 본격 활동한 것은 불과 10년 남짓. 평생 맹렬하게 책을 읽은 탐독가이자 방황하는 구도자, 열성적인 화가이자 수집가였던 그의 생은 급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책 전반에 스민 인생의 동반자였던 동생 테오와 쌍둥이 같은 교감과 갈등, 그리고 고흐가 죽은 뒤 형보다 더 불운했던 테오의 말년 또한 안타깝게 다가온다. 1000쪽에 가까운 이 두꺼운 평전은 ‘판 호흐’의 생애와 작품을 가장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현미경 노릇을 톡톡히 한다. ‘찾아보기’나 연표가 따로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평전의 모범으로서 두고두고 볼만하다. 더구나 한 가족의 명멸을 담은 대하 드라마로서 흥미롭고, 격동의 19세기를 다룬 품위 있는 유럽 문화사로서 권위를 자랑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