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3층 청암홀에서 연 한겨레말글연구소 주관 제11차 연구발표회 ‘정치적 올바름과 언어의 문제’에서 발표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발표회
‘정치적 올바름과 언어의 문제’
언론과 정치권 사용 언어 비판
‘정치적 올바름과 언어의 문제’
언론과 정치권 사용 언어 비판
지난 23일부터 24일까지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10시간18분 동안 테러방지법 반대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이어가자 여당 쪽은 “선전, 선동” “테러방지법에 대한 테러 행위”라고 비난했다. 정치의 장에서는 원색적 비난을 마땅히 참고 견뎌야만 하는 것일까?
정치 분야에서 횡행하는 불공정 언어나 왜곡어에 끌려다니지 말고 적극적으로 문제제기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강자에게 유리한 담론 질서를 바꾸어야 한다는 분석도 잇따랐다.
24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부설 한겨레말글연구소(소장 박창식)가 주관하고 한글학회와 한국어문기자협회가 후원한 제11차 연구발표회 ‘정치적 올바름과 언어의 문제’ 토론회에서다. 신문사 청암홀에서 연 이 행사에서 참석자들은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효과를 비판적으로 토론했다.
■ 부정적 편견 조장
조병래 전 <동아일보> 기자는 ‘언론보도와 정치적 올바름’ 발표에서 2015년 종합일간지 보도 사례를 분석했다. 그는 ‘선거판’ ‘정치판’ 등 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사례, 불법체류자를 ‘범죄 시한폭탄’이라 일컬어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는 보도에 이의를 제기했다. ‘귀족노조’ ‘고용세습’ ‘무차별 복지’ ‘세대간 도둑질’ 같은 언어 또한 부정적 편견을 강화하는 언어라고 지적했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집회나 시위에도 “유족 앞세워 청 진격” “작전회의” 같은 말로 비난을 조장한다고 보았다.
방송과 신문이 피동형 문장을 지나치게 자주 쓴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지영 전 <경향신문> 편집인은 “‘전해졌다’ ‘점쳐진다’ ‘파악된다’ 같은 피동형 문장은 발화의 주체를 은폐한다”고 말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 시기 언론이 정권을 비호하거나 권력의 잘못을 가릴 때 피동형 표현을 남용한 데 견줘 2009년 이후 기업이 광고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언론이 홍보용 기사를 쓸 때 피동형 표현을 남발한다는 것이다. 김하수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엔(N)포세대’ ‘헬조선’ ‘흙수저’ ‘이생망’ 등 신어를 언론이 맥없이 따라 쓰고 있다며 “좌절의 언어를 분노와 각성으로 이끌 언어 감각은 매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 ‘정상’ 담론과 양비론
표현의 자유가 점점 위축되는 지금, 단순히 언어를 교정하는 데 그쳐서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는 ‘표현의 자유’가 힘있는 자들에게만 유리하게 적용돼 ‘담론의 질서’가 기울어져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힘없는 자가 누릴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참혹하게 폐쇄되는 상황에서, 말할 권리를 인정하고 확장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기우뚱한 담론의 권력관계를 먼저 바로잡아 약자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과 정치권의 언어 왜곡’을 발표한 이근형 윈지코리아컨설팅 대표(광고홍보학 박사)는 정치 분야에서 약자를 배제하고 낙인찍는 불공정 언어를 맞닥뜨렸을 때 적극적인 대응을 하라고 주문했다. 이 대표는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에게 쏟아진 이념, 출신지역, 고령 등의 공격에 대해 ‘차별’이란 개념으로 맞섰듯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언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적극 고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 전반에 ‘정상’ ‘비정상’ 같은 단어를 널리 사용하는 것 또한 의도적인 프레임 짜기라고 분석했다. “‘정상’이 아닌 것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낙인찍는 의도”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얼핏 논리 자체가 중도적으로 보이는 양비론 또한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기득권층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이 대표는 밝혔다.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문제제기자’를 무력화하는 방식이므로 결코 중도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 언어를 풍부하게 하는 사전
언어를 풍부하게 쓰기 위한 사전의 구실에 대한 토론도 이어졌다. 지난해 <미친 국어사전>을 쓴 중학교 국어교사 박일환씨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오류가 심각하고 전문어가 지나치게 많은 반면 생활어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용운 겨레말큰사전 편찬실장은 표준국어대사전이 1999년 국가기관에서 편찬한 첫 사전으로, 8년이라는 길지 않은 사전 구축 기간 동안 51만개의 표제어를 다루면서 인력과 기간의 문제가 있었고 ‘깁고 더할 수 있는 기회’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은 일제 잔재로 남은 표현 대신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글로 사전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으며, 이승훈 한국어문기자협회 회장은 “표준국어대사전이 실제론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어들을 다수 표제어로 올려 한자어가 마치 우리말의 상당 부분을 이루는 것처럼 혼돈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사전임에도 종이사전처럼 도돌이표 하듯 단어 뜻을 찾아 헤매도록 하는 표준국어대사전의 낙후성 또한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전진식 <한겨레21> 기자는 “올림말(표제어)을 찾아 헤매지 않게 링크를 거는 등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했다”며 “뜻풀이 문장 또한 간결하고 정확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인호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은 “규정을 불필요하게 들이대며 말을 풍부하게 쓰지 못하도록 규제하기보다 사투리 등은 풀어주어 널리 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김선철 국립국어원 언어정보과장은 “국가사전이라는 형식 때문에 갖는 한계를 보완할 ‘개방형 한국어 지식대사전’(우리말샘)이 올해 말 탄생할 것”이라며 “국어사전 편찬에 국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고 소개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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