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은 어떤 형태든 노동자임에도 ‘노동 문제’라면 파업이나 농성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럴 때 노동자들은 각각의 얼굴과 표정을 잃고, 숫자로만 표시된다. 연극 연출과 극작을 하는 이양구(41)씨가 노동자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책 <호모 파베르의 인터뷰>(제철소 펴냄, 1만5000원)를 써냈다. 지난 25일 오후 서울 한겨레신문사에서 그를 만나, 노동과 인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2012년 안산 차부품업체 JSM 노조
회사의 ‘직장폐쇄’ 맞서 59일간 투쟁
용역깡패 2000명 동원해 ‘피의 난동’
지난해 노조원 30여명 생애사 인터뷰
“노동자마다 역사·세계 지닌 사람”
공단 아이들 대부분 ‘단원고생’ 친구
그는 2014년 쌍용차 손배소 문제를 다룬 연극 <노란 봉투>의 대본을 쓰고 연출하는 과정에서 안산 에스제이엠(SJM) 노동자들을 처음 만났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로, 2012년 7월27일 새벽 용역깡패의 난입으로 전쟁이 벌어졌던 곳이다. 300명도 안 되는 노조원은 깨지고 찢겨 회사에서 쫓겨났고, 59일간의 직장폐쇄 투쟁에서 승리했다. 이씨는 그때 싸움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조의 요청으로 지난해 1~2월 노동자 30여명을 집중 인터뷰했다. 녹취 분량이 A4 용지로 800~900장에 이르렀지만, 책은 이들 가운데 9명의 인터뷰만 문답 형식으로 담았다. 또 다른 8명의 사연은 ‘인물 에세이’로 정리해 덧붙였다.
이씨는 먼저 자동차 부품인 ‘벨로우즈’ 얘기를 꺼냈다. 이는 엔진과 배기통을 연결하는 부품인데, 엔진의 열과 진동을 막아주는 완충장치 구실을 한다. “벨로우즈와 같이, 노조는 자본과 사람 사이의 완충장치라고 생각했어요. 노조가 깨지면 사람이 바로 열과 진동을 맞게 되는 거죠.” 그런데 용역들은 ‘그날’ 새벽 노동자들이 만들었던 벨로우즈를 노동자들에게 마구 던졌고 공장은 피로 물들었다.
책에는 그날 벌거벗은 폭력 앞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용기와 서로에 대한 굳은 신뢰, 회사에 대한 배신감 등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서울 상암동에 용역 2000여명이 집결한 뒤 그 가운데 200여명이 이 회사로 몰려와 노동자들을 몰아내는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나머지는 다른 사업장으로 갔다고 한다. 노조 간부의 친구로 직업이 ‘깡패’인 사람이 용역들이 모이는 걸 알려주고, 노조 간부가 이들 속에 잠입해 이동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줬다는 대목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이씨가 의도한 대로, 책에 실린 9명의 인터뷰는 일정한 순서를 갖고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낸다. 먼저 상황일지를 쓴 정용일씨 이야기는 7월27일 새벽의 긴박한 상황을 담았고, 이어 용역의 침탈에 맞서 처음으로 공장을 지키자고 제안한 박선심씨는 용기를 상징한다. 안산 토박이 조동주씨는 안산이 원래 염전지대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강원도 탄광 출신의 정준위씨를 통해서는 안산으로 흘러든 사람들의 뿌리를 살핀다.
더 큰 성취는 책이 ‘단순한’ 노동운동의 현장 보고서에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씨는 책머리에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노동자도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슬프게 공감하게 된다. 아이들 종아리를 때릴 때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던 한 아버지는, 그날 새벽 연락을 받고 아들내미의 새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 공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벨로우즈에 맞아 입술이 너절너절해졌다. 여기에 비정규직으로 1년 계약을 맺고 공장에 들어온 이경원씨와 관리직으로 유일하게 함께한 정찬수씨, 정년퇴직을 앞둔 이상렬씨 등이 노조의 편에서 싸웠던 이야기를 통해 지은이는 노동자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특히, 이씨는 안산의 노동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세월호 문제와 연결돼 있음도 새로 발견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노동자 이용호씨의 큰딸은 1순위로 단원고에 지망했다가 다른 학교로 배정됐다. 큰애 친구들이 많이 세상을 떠났고, 세월호에서 살아 돌아온 친구는 이따금 밤늦게 이씨의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잠도 잔다. 아빠는 딸에게 노조에서 배운 대로 “가난하거나 어려운 처지의 친구를 도와라”라고 한단다. 책 곳곳에 이런 흔적이 흩어져 있다. 이씨는 “서울의 학부모는 상상도 할 수 없을 텐데, 안산 쪽 아이들은 초등학교·중학교 친구로 모두 연결돼 있다. 모두가 반월공단 노동자의 자식들인 셈”이라고 했다.
이씨는 이처럼 ‘생애사 인터뷰’를 통해 노동자의 얼굴을 찾아주려 노력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익명을 고집한 노동자를 설득하는 장면도 나온다. 노동자들의 한숨, 울분, 희망, 기쁨 등을 표현하기 위해 연극 대본처럼 지문을 넣고 대화식 서술을 이어갔다. 그는 또, 책에서 자신을 적극 드러냈다. 노동자들한테서 팩트를 캐내는 게 아니라 대등한 눈높이의 대화를 나누고 싶었고, 독자들도 그것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다. “노동자들이 각각 역사와 고유한 세계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노동자를 향한 폭력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아버지, 남편이라는 걸 안다면 그렇게 때릴 수 없죠.”
이씨는 지난해 연극계를 뒤흔들었던 검열 사태로 무척 바빴다. 오는 5월 연극 <필경사 바틀비>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여차저차 하다 보니 사회문제에 관심 많은 작가로 비치고 있네요. 그런데 저는 투쟁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탐구하려 합니다. 이번 책도 그런 작업 과정의 하나인 셈이죠.”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사진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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