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시인
[짬] ‘인도기행-시간의 뺨에 떨어진 눈물’ 곽재구 시인
2001년부터 15차례 오가며 ‘매료’
“이상촌 산티니케탄서 ‘평화’ 실감” 2009년부터는 민화 수집 기행으로
순천 와온 해변에 갤러리 열 계획
“가지면 운명이 따뜻해질 듯한 그림” 곽 시인은 5년짜리 인도 비자를 가지고 있다. 3개월 체류 조건만 지키면 이 기간 언제든 인도를 다녀올 수 있다. 인도 당국이 특혜를 베푼 것이다. 인도기행기를 보면 이런 호의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만난 인도에선 불쾌감을 느낄 요소는 깊이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신과 인간, 자연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평화롭고 고요하기만 하다. “인도 여행 동안 한번도 위험한 상황에 처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제가 힘들 때 여러번 도움을 받았지요.” 인도에 대한 통념과는 살짝 다른 것 같다. “사실 제가 인도란 나라를 선택해 간 게 아닙니다. 제가 간 곳이 우연히 인도였죠.” 설명이 조금 필요할 듯하다. 시인이 늘 가는 곳은 인도 콜카타 서쪽 산티니케탄이란 도시다. 산스크리트어로 ‘평화 마을’이란 뜻이다. 시성 타고르(1861~1941)가 노벨문학상 상금과 사재를 털어 만든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종의 이상촌이다. 시인은 이곳에 주로 머물면서 마음이 가는대로 인도의 다른 지역을 찾아다닌다. 그의 산티니케탄행은 “시에 모든 초(秒)를 바치고” 싶었던 20대 시절과 연결된다. “종교적이고 순수하면서 신과 인간의 교감이 있는 타고르의 시가 좋았죠. 우리 시인 중엔 아마 윤동주 시에서 그런 신성을 조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시인은 벵골어로 된 타고르의 시를 모두 우리말로 옮기고 싶었다. 벵골어를 배우기 위한 인도행은 20대 이후 그의 마음 속에 저장해놓은 “비상식량 같은 것”이었다. 50대 중반, 인도에 머물며 맘먹고 벵골어 공부에 나섰으나 쉽지 않았다. “자음·모음이 모두 50개가 넘고, 낮과 밤에 단어 표현이 달라집니다.” 완역의 꿈은 접었지만, 시인은 영어 번역을 참고해 타고르의 시 일부를 우리말로 옮겼다. 이 번역 시편은 5년 전 펴낸 산문집 <우리가 사랑한 1초들>에 실렸다. 산티니케탄은 어떤 곳인가. “학교에 출석부가 없어요. 아이들은 등교길에 꺾은 꽃 한송이를 선생님에게 전하지요. 학교 가면서 길에 꽃잎을 뿌리는 아이들도 있죠. 인간으로서 지고한 마음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책을 읽거나 공부할 필요가 없어요. 이 마을엔 이런 모습을 꿈꾸는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이 마을의 바람과 별, 소를 보면 인간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어요. 욕심을 내려놓고 나뭇잎, 햇살, 바람처럼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들지요.” 이번에 낸 기행기의 테마는 ‘인도 민화’다. 맘에 드는 민화를 찾아 인도 전역을 헤집고 다닌 이야기가 동화처럼 펼쳐진다. 시인은 2009년 민화에 빠져든 뒤 자신에게 “축제의 시간이 왔다”고 썼다. 그뒤 여행은 축제와 동의어였다. “(인도 민화에선) 새와 물고기가 결혼하고 해와 달이 이들의 모습을 축복하고, 신과 인간이 사랑을 나누지요. 우주의 품격(cosmic grade)이 느껴집니다.” 그가 만난 힌두교 사제는 이렇게 인사했다. “친구여, 네 삶이 우주의 품격을 지니기를!” 인도 민화 예찬은 조금 더 이어졌다. “형체와 색상이 자유롭고 춤추는 리듬감이 직접적으로 느껴집니다. 신들의 정원에 들어서는 느낌이죠. 민화 속 이야기가 인도의 실제 현실과 별 간격이 없어요. 전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죠.” 화가들 대부분은 불가촉천민들이다. 우리 민화를 그린 예술가들도 미천한 신분이었다. “브라만 계급인 학자들은 인도 민화를 예술품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연구도 하지 않지요.” 시인은 88년부터 순천대에 자리를 잡은 2001년까지 전업작가 생활을 했다. 그 시절 그의 주머니는 두둑했다. 동화책과 에세이가 대형 베스트셀러였던 덕분이다. 그는 91년부터 전남대에 있던 미술사 전문가 이태호 교수(현 명지대)의 도움으로 우리 민화와 고서를 수집했다. 왜 굳이 사야 할까. “아름다움에 대한 소유욕이겠죠. 저 그림과 같이 있으면 내 운명이 따뜻해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죠.” 인도 민화를 몇점이나 소유하고 있는지 물었다. “세어보지 않아 모릅니다. 광주와 순천의 집 그리고 대학 연구실 곳곳에 있죠. 2010년 귀국 때 이민 가방에 담은 그림 무게만 55㎏이었으니까요.” 2011년 이후 인도행은 모두 “민화를 사기 위한 여행이었다”고 했다. 한달 인도여행 경비가 500만원이라면 300만원은 민화 구입에 쓴다. 은퇴하면 와온바다가 보이는 곳에 산티니케탄 갤러리를 열 생각이다. 그곳의 주인공은 물론 인도 민화다. ‘홀로 떠나는 인도 여행’에 대한 부인의 반응을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이건 내 삶입니다. 이걸 버리면 내 삶이 되지 않죠. 삶이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운명에 가장 큰 죄는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약자를 도우면서 평생 좋아하는 일 한 가지만 하고 산다면 그 사람이 신이다”고 했다. 인도 민화 예술가에게서 종종 신을 발견한다. 그럼 그 자신은? “그림(인도 민화) 모으려고 작전도 쓰고 팔라고 조르고 그러는데, 신이라뇨 허허.” 와온바다를 닮은 따스한 미소가 시인의 얼굴에 퍼졌다. 순천/글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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