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지방선거 당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초등학교에 마련된 투표소 풍경. 선거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전제이자 최소한의 절차이지만, 정치에 실망한 저소득 빈곤층은 투표 불참으로 정치과정에서 스스로 ‘이탈’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실망 저소득층 기권으로 정치 ‘이탈’
‘있는 계층’ 주도 과두정 위험 경고
신광영 교수 ‘불평등과 민주주의’ 논문
‘있는 계층’ 주도 과두정 위험 경고
신광영 교수 ‘불평등과 민주주의’ 논문
4·13 총선 투표일이 다가오면서 정치권과 언론의 관심은 투표율에 쏠리고 있다. 4년 전 총선에서 54.2%를 기록했던 투표율이 이번에는 어떻게 변화할지, 특히 연령대별 투표율이 각 정당의 득표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셈하느라 분주하다. 선거를 게임으로 간주한다면 그즈음에서 멈춰도 무방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내용과 미래를 걱정한다면, 주의 깊게 봐야 할 지표가 하나 더 있다. 소득 계층별 불투표율(기권율)이다.
월소득 100만원 이하 29.26%, 101만~199만원 30.54%, 500만~699만원 23.00%, 700만원 이상 23.33%. 2012년 총선의 소득 계층별 불투표율에서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자신의 소득구간에 답하지 않은 38%를 감안하더라도, 저소득층 유권자들의 투표 불참은 두드러져 보인다. 언론과 일부 정치학자들이 이름지은 ‘계급 배반투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목소리 내기’(voice) 또는 의사표시를 포기하는 행동이다. 왜 그들은 고소득층보다 투표에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한 것일까? 그들의 그런 태도는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한국사회학회 주최로 지난달 31일 열린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 심포지엄에서 우리 사회의 소득 불평등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부르고, 이를 방치할 경우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자원과 지식을 가진 집단”에 의한 사실상의 과두정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불평등과 민주주의’라는 발표문에서 신 교수는 갈수록 심해지는 불평등이 근로 빈곤층 등 경제적 소외 계층으로 하여금 정치권력과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에 불신을 갖게 하고, 결국 민주주의는 ‘밥’과 무관하다, 효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그들이 정치과정에서 스스로 ‘이탈’(exit)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불참은 민주주의의 약화로 이어지고, 결국 불평등은 개선되지 않거나 심화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 메커니즘을 보여주기 위해 신 교수는 민주주의와 선거지원을 위한 국제기구(IDEA, International Institute for Democracy and Electoral Assistance)가 집계한 각국 투표율, 소득 분배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유엔개발계획(UNDP)의 지니계수,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주로 사용하는 ‘상위 10% 소득집단의 부 점유율’(피케티 지수), 세계 주요 국가의 상대적 빈곤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정부 신뢰도 조사, 세계 가치조사기구 ASEP/JDS의 ‘신뢰 지수’(Trust Index) 등 다양한 자료들을 동원해 실증에 나선다.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19대 총선(2012)과 가장 근접한 2010년 전후 각국 선거에서 “대단히 높은 설명력을 보여준” 것은 상대적 빈곤율과 정부에 대한 신뢰도, 투표제도였다. 상대적 빈곤율이 높은 나라,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나라일수록 투표율은 떨어졌다. 불평등하다고 느끼는 저소득층 유권자들은 정부의 정책이 고소득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의심해 투표를 사실상 거부했다는 뜻이다. 정치가 소득,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집단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호응성’(Accountability) 면에서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냉정한 평가이기도 하다.
예컨대 브라질과 오스트리아는 공히 의무투표제를 시행하고 있다. 투표를 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린다. 그럼에도 불평등이 심각한 브라질의 투표율은 74.72%에 머물렀다. 그렇지 않은 오스트리아는 투표율이 92%나 됐다. 자유투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덴마크와 칠레도 좋은 비교 사례다. 불평등 정도가 낮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덴마크는 최근 선거에서 87.7%의 투표율을 기록했지만, 그 반대인 칠레는 과반에도 못 미치는 49.2%에 그쳤다. 투표 결과의 정당성마저 시빗거리가 될 수 있는 수치다.
민주화와 세계화가 거의 동시에 이뤄진 한국의 경우엔 불평등 현상이 더욱 심각하고 엄중하다. “세계화의 부정적 효과가 민주화의 긍정적 효과를 상쇄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으로 시작된 세계화가 외환위기로 귀결되면서 신자유주의적 변화가 전 사회를 휩쓸었다. 실업자·무직자 등 전통적인 영세민뿐 아니라 일을 하는데도 임금 소득이 낮고 고용이 불안정한 ‘근로빈곤층’이 새로 생겨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김대중·노무현이 집권했던 2000년대 초·중반을 지나면서는 전체 빈곤층의 70% 이상이 이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정부와 정치권에 냉소적이다. ‘투표로 바꿔 보자’는 따위 구호는 경험적으로 믿지 않는다.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신뢰도 또한 낮다. 이는 ‘사회적 자본’의 약화, 공동체적 유대의 균열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요소다.
신 교수는 빈곤층과 노동계급의 정치 이탈 현상을 이대로 두면 선거가 정상적으로 치러지더라도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는 ‘역설’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이 빠져 나간 자리는 결국 부를 과점한 계층과 그들 편에 서는 소수의 정치인들이 ‘과잉 대표’하게 된다. “정치과정에서 과잉 대표되는 사회계급과 배제되는 사회계급 간의 격차는 더욱 커지게 된다.” 민주주의가 공고화 과정을 밟지 못하고 ‘반(semi) 권위주의’나 권위주의로 퇴행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는 것이다. 여기에 최고 권력자나 집권 세력의 의지가 더해지면 어떻게 될까?
신 교수는 정치과정에서 이탈했거나 이탈하려던 이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정치가 제때 답을 하는 ‘호응성’ 강화에서 악순환을 끊을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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