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사진 최재봉 기자
편혜영 지음/문학과지성사·1만3000원 편혜영의 네번째 장편 <홀>은 한 남자의 실존에 파인 구멍에 관한 이야기다. 운신이 힘들 정도로 몸이 망가진 주인공이 제 집 정원에 파 놓은 구덩이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이 소설에서 정원의 구덩이란 물론 그의 내면과 인간 관계를 갉아먹은 공동(空洞) 또는 함정을 상징한다. 소설은, 아내는 즉사하고 운전하던 자신은 온몸이 마비될 정도로 크게 다치는 교통사고 이후 주인공 ‘오기’가 병원 침대에서 가까스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고 눈꺼풀에서부터 시작해 몸의 일부를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오기는 지나온 삶을 돌이킨다. 결혼한 지 15년이 되었으며 지리학 전공 교수 신분인 40대 남자 오기는 자신의 지난 삶을 이렇게 요약한다.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점점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노골적으로 술수를 부렸고, 그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종종 이 삶이 너무 안온해서 어느 것도 바꾸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수중의 것은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흔하고 보편적이어서 차라리 정상적이랄까 아예 모범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인간형을 가리키는 말이 있으니, ‘속물’이 그것이다. ‘속물’은 아내가 오기를 비난하고 고발할 때에도 등장한다. 버석거리던 부부 관계를 개선하고자 떠난 둘만의 여행에서 아내는 요즘 자신이 쓰고 있다는 글을 화제에 올린다. ‘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이라고 아내가 소개한 그 글의 내용과 용도는 이러했다. “일찌감치 속물이 된 남자가 성공을 위해 어떻게 우연과 술수를 활용하는지, 그의 도덕적 해이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후배와 오랫동안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그의 특별한 윤리 감각을 드러내는 일화라고 비아냥거렸다. 아내는 그 글을 몇 곳에 발송할 예정이라고 했다. 학과나 학교 본부, 학회 및 동료들에게.” 그 직후 핸들 쥔 남편의 팔을 아내가 뒤흔드는 식의 몸싸움이 치명적인 교통사고로 이어진 것인데, 막상 사고의 순간 오기의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진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안달복달하며 삶을 꾸려오던 게 조금 억울했지만 삶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피로감이 더 압도적이었다.” 어느 정도 나아진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온 오기와 ‘유일한 가족’으로 그를 간병하는 장모 사이에 또 다른 긴장과 알력이 생기고 그 결과로 오기는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지만, 그의 추락은 사실 교통사고를 당하기 훨씬 이전부터 준비돼 온 셈이다. 그러니 이 속물은 “모두 잃게 될 줄도 모르는 채, 얼마나 오래전부터 인생에 헌신해온 걸까.”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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