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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과거 나타내는 ‘-었었-’ 홀대, 이젠 끝내야”

등록 2016-04-14 21:33수정 2016-04-18 11:27

2004년 10월6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연세대학교 언어연구교육원 한국어학당이 주최해 열린 제13회 외국인 한글백일장에 참여한 외국인들이 글쓰기에 열중해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4년 10월6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연세대학교 언어연구교육원 한국어학당이 주최해 열린 제13회 외국인 한글백일장에 참여한 외국인들이 글쓰기에 열중해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었-’만으론 표현에 한계 뚜렷
의미효과 인정.문법적 수용 필요
박진호 서울대 교수논문서 주장
# 1. 어느 추운 겨울날. ㄱ 교수가 자기 방에 있다가 동료 교수 ㄴ의 방에 들렀는데, 창문이 닫혀 있는데도 방안 공기가 매우 싸늘하다. ㄱ이 ㄴ에게 묻는다. “창문 열어 놨어?” 또는 “창문 열어 놨었어?” 어느 질문이 맞을까?

# 2. 같은날 어느 회사 사무실. 일순간 차가운 바람이 쌩 하고 느껴진다. 창에서 먼 쪽에 있던 ㄷ이 창 바로 옆에 앉아 있는 ㄹ에게 묻는다. “창문 열어 놨어?” 또는 “창문 열어 놨었어?” 어느 질문이 맞을까?

이 두 질문의 답은 다르다. 장면 1에서 힌트는 닫힌 창문이다. ㄱ이 ㄴ의 방에 들어오기 전에 창문이 열려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ㄱ이 ㄴ의 방에 들어온 ‘지금’ 창문은 닫힌 상태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해도 이미 과거에 끝나버린 것이다. 한국어에서 ‘-었-’과 ‘-었었-’은 둘 다 과거시제를 나타내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과거의 상황이 현재도 계속되는지 여부다. 상황이 종료됐으니 “창문 열어 놨었어?”라고 묻는 것이 맞다.

그러나 장면 2는 전혀 다르다.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고, 그래서 ㄷ이 창문 옆에 앉아 있는 ㄹ에게 ‘지금’ 창문을 열어놨는지 묻고 있다. ‘현재진행형’인 상황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창문 열어 놨었어?”라고 묻는다면 틀린 질문이 된다.

‘었었’의 용법은 또 하나의 예문에서 좀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 3. ㅁ이 ㅂ에게 담배 값 인상 전후로 흡연량이 늘거나 줄었는지를 묻는다.

ㅁ: 요즘 하루에 담배를 얼마나 피워?

ㅂ: 하루 한 갑 피워.

ㅁ: 담배값 인상 전에는?

ㅂ: 그 때는 하루에 한 갑 조금 넘게 피웠었어.

이처럼 한국어에서 ‘었었’은 단순과거를 나타내는 선어말 어미 ‘었’과 달리 과거 사건과의 대조 또는 현재와 단절된 과거, 즉 ‘단절과거’(discontinuous past, DP)를 나타낸다. 단절과거는 과거의 사태나 결과 또는 동작이 현재는 더 이상 계속되지도 성립되지도 않는다는 분명한 의미 효과를 갖는다.

‘었었’은 현실에서 널리 많이 쓰인다. 주로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 글말이나 입말 등에서다. ‘었었’의 출발점은 일상 생활에서 의사소통을 위한 말하기, 즉 화용론(Pragmatics) 차원이었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었었’은 공식성을 띠는 글말에서는 거의 선택되지 않는다. ‘었었’이 이처럼 기피 대상이 되고, 문법에서도 합당한 ‘지위’를 얻지 못하는 까닭은 ‘었’만으로도 단절과거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는 기존 문법학자들의 판단과 ‘었’의 중복 표기가 주는 어색함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었었’은 국어연구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는 되어 있지만, 문법체계에서는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었었’과 관련해 박진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언중의 언어생활에서 이미 관습화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문법체계 속에 정당하게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최근 나온 계간 <한글>(한글학회) 봄호에 기고한 ‘‘-었었-’의 단절과거 용법에 대한 재고찰 - 함축의 관습화와 유형론의 관점에서’라는 논문을 통해 ‘었었’이 여태 “주변적인 용법으로” 홀대받는 원인이 기존 한국어 문법연구의 고루함 혹은 잘못된 접근법에 있다고 지적한다. “형태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나타내는 의미로 나아가는 해석론적 접근법을 흔히 취해”온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가 ‘었었’에 대해 해석론적 접근법의 반대, 즉 “(현실에서 언중이 널리 쓰고 있는 말의) 개념/의미에서 출발해 그것을 나타내는 언어 표현으로 나아가는 표현론적 접근법”을 더 유효하게 보는 까닭은 한국어교육, 특히 표현 교육에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발화(소리 내어 말하기)시 현재에는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 사태(또는 그 결과상태)를 나타내고자 할 때 ‘-었-’은 불가능하거나 부적절하고 ‘-었었-’이 안성맞춤인 경우가 매우 많이 있다. 이런 용법/의미 효과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은 문법가와 사전 편찬자의 중요한 과제이다.”

‘었었’은 이미 일상 입말에 관습화되어 정착된 “매우 다의적인 문법요소”이기도 하다. 과거 어느 시점보다 앞선 시점에서 일어난 일을 표현하는 대과거, 과거 완료, 과거 사태의 결과 취소, 과거 어느 시점에서 일어난 상황을 나타내는 틀과거(frame past), 먼 과거 등 박 교수가 열거한 것만 해도 10가지에 이른다. 한국어의 ‘었었’처럼 과거·완료 표지를 중복 사용해 단절과거를 나타내는 표현은 외국어에도 많이 있다. 가령 프랑스어엔 중복합과거를 표현하는 ‘avoir eu PP’가 있고, 러시아 일부와 몽골 등에서 쓰이는 어웡키어(에벤크어), 폴리네시아·서부 아프리카·크리올 등의 언어에도 단절과거에 특화된 표현들이 존재한다.

“이런 경우를 보면, ‘단절과거’라는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는 표현 욕구는 세계 어느 언어에나 매우 빈번하게 발생하며, 어떤 수단이든지 동원해서 이 의미를 나타내려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중은 어떤 개념을 설명할 적절한 장치가 기존 문법에 없으면 새롭게 만들어낸다. 대화 중 헛갈리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었었’이라는 단절과거 표지도 그런 개념의 하나다. 그러나 문법도 법이어서 그 벽은 그지없이 높다. 여간해선 바뀌지 않는다. 박 교수가 같은 취지와 내용으로 논문을 쓴 것은 지난해 세 차례 학술대회를 포함해 이번이 네번째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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