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의 언어
마리야 김부타스 지음, 고혜경 옮김
한겨레출판·5만원 ‘태초에 여신이 있었다’는 여신 숭배 학설은 고고학계의 ‘스캔들’이었지만, 동시에 여성이 주체가 되는 역사로서 ‘허스토리’(herstory)를 구성할 수 있다는 신념에 불을 지폈다. 선사시대 기나긴 시간 동안 인류는 여신을 숭배했지만, 뒤이어 등장한 지배층이 가부장제와 부계 체제를 앞세워 이를 무력화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부터 ‘고대 유물 다수에 여신 숭배 사상이 담겨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한 구소련 리투아니아 출신 미국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마리야 김부티에네, 1921~94)의 대표작이 번역돼 나왔다. <여신의 언어>(미국 초판 1989년 출간)는 고고학, 비교신화학, 민담을 아우르는 고고신화학(archeomythology) 책으로, 초기 인류가 ‘위대한 여신’(Great Goddess)을 숭배했다는 학설을 수립했다. 이번에 나온 한국어판도 대작의 아우라를 살려 250×300㎜ 크기, 416쪽이나 된다. 김부타스는 1950~60년대 하버드대학과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에 재직하며 구소련과 동유럽의 고고학자료를 연구했다. 하버드대의 유일한 여성 고고학자로서 10년 넘게 전쟁 유물을 분류하다가 크게 실망한 뒤 연구 분야를 인도-유럽 신석기 문화 이전의 시대인 ‘올드 유럽’으로 옮겼다고 한다. 김부타스는 기원전 6500~3500년께 유럽 유물 2000여점을 분류하고 상징을 해석했다. 여신상, 부조, 조각, 토기, 무덤, 회화 등에서 “일종의 메타언어”를 발굴하려 한 것이다. “만일 비전이 없다면, 시인이나 아티스트가 아니라면, 보이는 게 별로 없을 것이다.” 고고학의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지 않았다는 학계의 비판을 무시하듯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원전 4300~2800년께 무기를 중시하고 가부장성 강하던 흑해 연안 쿠르간(봉분 있는 무덤)인들은 거듭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올드 유럽을 침탈한다. 이렇게 사회구조가 남녀평등에서 남성 지배로 전환되었다고 김부타스는 설명한다. 그리고 비판의 위험을 감수하며 ‘올드 유럽’ 유물의 상징과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 신앙을 연관지어 추론했다. “나는 선사시대 예술과 종교의 의미는 결코 파악할 수 없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직관적 추리라는 비난이 나왔지만 그는 <여신의 언어>라는 책 제목처럼, 고고학적 유물들은 침묵하지 않으며 여전히 말하고 있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이 책에 담긴 사진, 그림 자료 1000여컷은 생명의 부여 재생과 영원한 세계 죽음과 탄생 에너지와 흐름 등으로 분류돼 묶였다. 핵심은 탄생-죽음-재탄생의 순환이다.
이에 저명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1904~87)이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찬사로 가득한 추천사에서 캠벨은 선사시대 실존하는 역사를 김부타스가 발굴했다고 본다. 캠벨은 ‘꿈은 개인의 신화이고 신화는 집단의 꿈’이란 주장을 폈고, 김부타스 또한 여신 전통이 인류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지만 꿈이나 판타지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고 주장했다.
여신 전통 이론에 대해 당시 페미니스트들의 의견은 두쪽으로 나뉘었다. 1970년대 페미니즘 영성가들은 그의 이론에 열광했지만, 역사학·인류학계 반응은 냉랭했다. 고고학계는 거의 ‘사이비’ 취급에 가까웠다. 1960~70년대 페미니즘 제2물결을 주도한 글로리아 스타이넘,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을 쓴 정신분석가 진 시노다 볼린은 김부타스의 이론에 찬탄을 금치 않았다. 저명한 미국 인류학자 미셸 로잘도와 루이즈 램피어는 여신 전통 이론과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여신상이 곧 여성지배를 뜻할 수는 없으며 모권제가 지배적이었다는 상상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을지 몰라도, 실제 그런 지배적인 문명이 있었다는 증거는 미미하다는 것이다.
<모권>을 쓴 바흐오펜과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쓴 엥겔스는 모권제 사회의 존재를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김부타스의 견해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그가 모성을 여신성/여성성과 일치시켰다는 세간의 평가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머니 여신’이란 단어는 부적절하고, 여신 이미지는 다산·풍요·모성을 넘어선 개념이라며 “어머니라는 표현은 여신의 힘을 축소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밝히기 때문이다.
많은 비판이 있지만, 어느 한 성이 다른 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성별 위계 관념을 배제한다면, 김부타스가 불러일으킨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상징 분석은 인류의 지적 자산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부타스가 ‘여신’의 상징이라고 해석한 것은, 근대 이후 이타주의와 모성주의로 구성된 ‘여성성’을 뛰어넘는 통합적인 체계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불교 전통에서 보살들의 성별이 의미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명-죽음-재탄생으로 이어지는 순환 개념은 전 우주가 원래 하나였다는 현대 과학적 성과와도 연결되는 상상력 아닐까.
책에는 아름답고 성적인 문양, 기호, 동물상징, 토템 여신들이 다수 등장해 학자들뿐 아니라 예술적인 창작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성싶다. 출판사와 옮긴이의 끈질긴 작업 끝에 한국어판이 나오기까지 8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옮긴이 신화학자 고혜경은 “어느 때보다 인간의 상상력이 절실한 이 시기,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독자들의 상상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마리야 김부타스 지음, 고혜경 옮김
한겨레출판·5만원 ‘태초에 여신이 있었다’는 여신 숭배 학설은 고고학계의 ‘스캔들’이었지만, 동시에 여성이 주체가 되는 역사로서 ‘허스토리’(herstory)를 구성할 수 있다는 신념에 불을 지폈다. 선사시대 기나긴 시간 동안 인류는 여신을 숭배했지만, 뒤이어 등장한 지배층이 가부장제와 부계 체제를 앞세워 이를 무력화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부터 ‘고대 유물 다수에 여신 숭배 사상이 담겨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한 구소련 리투아니아 출신 미국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마리야 김부티에네, 1921~94)의 대표작이 번역돼 나왔다. <여신의 언어>(미국 초판 1989년 출간)는 고고학, 비교신화학, 민담을 아우르는 고고신화학(archeomythology) 책으로, 초기 인류가 ‘위대한 여신’(Great Goddess)을 숭배했다는 학설을 수립했다. 이번에 나온 한국어판도 대작의 아우라를 살려 250×300㎜ 크기, 416쪽이나 된다. 김부타스는 1950~60년대 하버드대학과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에 재직하며 구소련과 동유럽의 고고학자료를 연구했다. 하버드대의 유일한 여성 고고학자로서 10년 넘게 전쟁 유물을 분류하다가 크게 실망한 뒤 연구 분야를 인도-유럽 신석기 문화 이전의 시대인 ‘올드 유럽’으로 옮겼다고 한다. 김부타스는 기원전 6500~3500년께 유럽 유물 2000여점을 분류하고 상징을 해석했다. 여신상, 부조, 조각, 토기, 무덤, 회화 등에서 “일종의 메타언어”를 발굴하려 한 것이다. “만일 비전이 없다면, 시인이나 아티스트가 아니라면, 보이는 게 별로 없을 것이다.” 고고학의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지 않았다는 학계의 비판을 무시하듯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원전 4300~2800년께 무기를 중시하고 가부장성 강하던 흑해 연안 쿠르간(봉분 있는 무덤)인들은 거듭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올드 유럽을 침탈한다. 이렇게 사회구조가 남녀평등에서 남성 지배로 전환되었다고 김부타스는 설명한다. 그리고 비판의 위험을 감수하며 ‘올드 유럽’ 유물의 상징과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 신앙을 연관지어 추론했다. “나는 선사시대 예술과 종교의 의미는 결코 파악할 수 없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직관적 추리라는 비난이 나왔지만 그는 <여신의 언어>라는 책 제목처럼, 고고학적 유물들은 침묵하지 않으며 여전히 말하고 있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이 책에 담긴 사진, 그림 자료 1000여컷은 생명의 부여 재생과 영원한 세계 죽음과 탄생 에너지와 흐름 등으로 분류돼 묶였다. 핵심은 탄생-죽음-재탄생의 순환이다.
중앙에 자궁 부위 삼각형이 강조된 여신상. 금석(金石) 병용시대 키프로스(석회암, 지역 미상, 기원전3000년께, 높이 39.5㎝). 한겨레출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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