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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순경 사건’의 소설적 재구성

등록 2016-04-28 20:41수정 2016-04-29 08:36

소설가 김경욱
소설가 김경욱
개와 늑대의 시간
김경욱 지음/문학과지성사·1만3000원

김경욱의 소설 <개와 늑대의 시간>은 1982년 4월26일 경남 의령에서 벌어진 ‘우순경 총기 난사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카빈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파출소 순경이 하룻밤 사이에 한 마을 주민 55명을 무차별 살해한 이 엽기적인 사건을 작가는 피해자 11명의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소설의 첫 장은 엉뚱하게도 1930년대 미국 미네소타주로 독자를 데려간다. 우순경 사건의 출발점을 카빈 소총 발명에 둔 것인데, 얼핏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이 심층에서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이런 연기론적 사유는 소설 곳곳에서 보인다. 역시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6·25 전쟁과 베트남전쟁,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등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명치에 총을 맞는 순간 손미자는 달걀을 움켜쥐었다. 돌아선 사랑의 팔을 붙들듯. 깨진 달걀이 흘러내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껍질을 잃은 생명의 엑기스는 무섭도록 차가웠다. 스물네 해, 손미자의 온 생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갔다.”

범인 ‘황순경’의 잔인한 성격과 우발적인 범행 의도에서 비롯된 사건인 만큼, 피해자들의 죽음에서는 어떤 필연성도 찾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자연재해에 가까운 죽음이라 하겠다. 신학대학에 진학해 신부가 되고 싶었던 대학생 박만길(24)에서부터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팬인 초등학생 고동배(11)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의 죽음은 단일한 사건으로 묶이게 되었지만 그들이 죽기 전까지 꾸렸던 삶은 개별적이고 고유하다. 작가는 죽음의 순간보다는 살아 있을 적 그들의 일상과 꿈을 묘사하는 데 더 공력을 기울인다. 그럼으로써 어처구니없는 죽임과 죽음의 폭력성을 거꾸로 부각시킨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운 본능은 어서 숨으라고, 어둠 속에 몸을 감추라고 속삭였다. (…) 분수를 아는 사람 손백기는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 숨었다. 뒷간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자기도 모르게 바지춤을 내리고 쭈그려 앉았다.”

“군청 트럭이 현장, 그러니까 궁지면 하곡리 초입에 당도한 것은 손반기가 당직실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지 한 시간 52분 뒤였다.”

1982년 당시 우순경이 밤 9시40분부터 다음날 새벽 5시35분까지 4개 마을을 돌며 주민 55명을 살해하고 결국 자폭으로 상황을 마무리하기까지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은 손을 놓고 있다시피 했다. 소설에 그려진바, 마을 방송을 포기하고 변소에 숨은 이장에서부터 늑장 출동한 공무원과 경찰 등의 어이없는 대응은 연전의 세월호 참사를 떠오르게도 한다.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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