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소설집 <베개를 베다>를 낸 작가 윤성희. “삶에 대해 비관보다는 그래도 낙관을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윤성희 소설집 ‘베개를 베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실연…
고통이 깊어도 좌절은 없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실연…
고통이 깊어도 좌절은 없다
윤성희 지음/문학동네·1만2000원 윤성희의 소설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슬픔이라는 범주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평범한 인물들이 제 몫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 내며 그 과정에서 성취를 이루거나 좌절을 겪는,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가 윤성희의 소설 세계를 이룬다. 텔레비전 일일 드라마만큼의 자극과 충격도 없어 보이는 윤성희의 소설이 그럼에도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는 까닭은 ‘윤성희 스타일’이라 이를 법한 독특한 형식과 태도 때문일 것이다. 다섯번째 소설집 <베개를 베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전하다. 소설집 맨 앞에 실린 ‘가볍게 하는 말’에서 화자 아버지의 칠순 잔치에 온 고모는 주인공이 덕담처럼 내뱉은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라는 말을 남긴 채. 무엇이 부끄럽다는 것일까. 문제가 된 아버지의 말인즉 “모든 집이 무탈하게 살게 되어 행복하다” “이만하면 우리 집안도 성공한 거 아니겠냐”는 취지였다. 그 말에 고모가 발끈한 까닭은 무엇일까. 고모의 외아들이자 손자 수현의 아버지인 태우 오빠가 일찍 죽었다는 사실은 소설 여기저기에 지나가는 말처럼 흩뿌려져 있다. 수현은 엄마도 없이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데, 엄마 역시 죽은 것인지 아니면 이혼 등으로 헤어진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고모의 말은 누이동생이 참척의 아픔을 겪은 걸 알면서 오빠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 별생각 없이 가볍게 하는 말의 폭력성, 남의 불행에 둔감한 채 제 몫의 행복만은 악착같이 챙기는 속물근성에 대한 문제 제기다. 소설의 핵심 정보를 생략함으로써 긴장과 여운의 효과를 거두는 방식은 윤성희가 즐겨 구사하는 기법이다. ‘못생겼다고 말해줘’에서도 화자의 쌍둥이 언니가 아마도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직접 진술이 아니라 간접 증거들을 통해 짐작하도록 처리된다. 표제작 ‘베개를 베다’는 교사인 아내와 이혼하고 갑자기 엑스트라가 된 남자의 이야기인데, 이 부부의 미성년 아들이 먼저 죽었다는 사실 역시 눈 밝은 독자에게나 포착될 정도로 희미하게 암시된다. “여보, 난 엑스트라가 되어야겠어”라는 말이 사실은 “여보. 난 무서워”를 대신한 고백이었다는 진술은 그가 얼마나 이를 악물고 고통에 맞서 싸우는지를 알게 한다. 이번 소설집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특징은 술을 포함한 음식과 먹는 행위의 묘사가 많다는 점이다. ‘가볍게 하는 말’에서 사고로 입원한 고모와 병문안 온 일행은 병원 근처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데, 도가니탕 만이천원에 수육은 이만삼천원이고 겨자소스 다섯 종지와 깍두기와 배추겉절이와 부추무침이 반찬으로 딸려 나온다는 식의 시시콜콜한 묘사는 어쩐지 고모가 겪는 몸과 마음의 고통을 완화하는 효과를 준다. ‘못생겼다고 말해줘’에서 모녀가 삼계탕을 먹고 맥주를 마시는 행위, ‘베개를 베다’에서 주인공이 처지가 비슷한 이혼남들과 포장마차에서 어울리는 장면 등도 같은 맥락이다. 진수성찬은 아닐지라도 마음이 통하는 이들과 음식을 나누는 일은 인생의 어떤 시련과 아픔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한 위안을 건넨다. 음식과 더불어 윤성희 소설 주인공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또 다른 요소로 ‘일상의 의례’를 들 수 있다. 남들 눈에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작은 규칙 같은 것. 어머니를 위해 전깃줄에 앉은 참새 사진들로 악보를 만드는 일(‘못생겼다고 말해줘’), 독신으로 늙은 언니에게 새 거울을 선물하면서 “반드시 세수를 마치고 거울을 보면서 볼을 두 번 두드릴 것. 음. 괜찮군. 그렇게 말하고”라 주문하는 것(‘날씨 이야기’), 바퀴 없는 자전거를 공중화장실 벽에 기대 세워 놓고 그 벽에 바퀴를 그려 넣는 행위(‘낮술’) 등이 그 예들이다. 윤성희 소설 주인공들은 어른이 된 뒤에도 아이처럼 철없는 놀이에 탐닉하고는 하는데, 이런 소소한 의례와 놀이 역시 고통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장치라 하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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