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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신여성’은 하나가 아니었다

등록 2016-05-05 20:19수정 2016-05-17 10:31

‘조선공산당의 여성 트로이카’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왼쪽부터)이 서울 청계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들 사회주의자 계열 여성은 성과 사랑에서 급진주의자 못지않은 자유로움을 추구했다. 푸른역사 제공
‘조선공산당의 여성 트로이카’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왼쪽부터)이 서울 청계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들 사회주의자 계열 여성은 성과 사랑에서 급진주의자 못지않은 자유로움을 추구했다. 푸른역사 제공
김경일 ‘신여성 3부작’ 마무리
사회주의 여성 섹슈얼리티에
남성 지식인 “정조 사수하라”
신여성, 개념과 역사
김경일 지음/푸른역사·2만원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가 12년 만에 ‘신여성 3부작’을 마무리했다.

<신여성, 개념과 역사>는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2004)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2012)의 뒤를 이은 결산으로서 의미가 있다.

지은이는 식민지 조선 사회에 충격을 던진 ‘신여성’을 모두 뭉뚱그려 하나의 정체성으로 파악해온 인식, 연구들과 선을 긋는다. 신여성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 ‘구성된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근대 여성들은 세대·이념·식민주의에 대한 견해와 실천이 서로 달랐다. 복합의 정체성이 교차하고 각축했다.

이번 책은 몇몇 대표적인 신여성에게 초점을 맞춰 그들이 각자 시대와 어떻게 불화하고 타협했는지를 부각했다. 신여성 개념도 1900년대 애국계몽기의 제1세대, 1920년대 제2세대, 1930년대 중반 이후 제3세대 근대 여성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구분은 ‘신여성’이라는 하나의 기호를 뒤집어쓴 당시 여성의 삶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를 해소하는 방법이 된다.

근대 여성의 세대 구분이 유용한 지점은 특히 남성 근대주의자들이 주도한 ‘근대국가 프로젝트’와 신여성의 관계를 해명할 때다. 1세대 근대 여성은 남성 권리 영역을 그대로 인정한 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촉구했다. 반면 2세대는 여성의 열악한 지위가 남성 지배와 관련있다며 가부장 권력에 도전했다. 자유연애와 여성 해방을 공론화한 나혜석(1896~1948), 김원주(김일엽, 1896~1971), 윤심덕(1897~1926)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등장한 1920년대는 자의식을 가진 ‘여성’ 범주가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출현한 시기였다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2~3세대 여성들은 이념과 지향에 따라 다시 나뉜다. 근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강했던 ‘자유주의’ 계열 여성들은 가정일, 육아, 여성의 사회역할에서 어머니 세대의 전통을 일정 정도 계승했다. “근대 가부장 질서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상호 존립과 화해의 방식을 통해 이들은 남성 중심의 식민지 기성 체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 역할을 했다.” 나혜석류의 급진주의 여성이 사회에서 배제, 추방된 것과 달리 자유주의 여성들은 1930년대 이후 일제 전시동원체제에 호응하며 다수가 친일의 길을 걸었다.

반대로 구시대에 오염된 근대를 함께 비판했던 ‘사회주의’ 계열 여성들은 자유주의 여성들과도 대척했다. “부르주아 도덕”을 따르며 “착취에 굴종하는 구여성”이라는 얘기였다. 사회주의 계열 여성들은 “강렬한 계급의식을 가진 무산 여성”(정칠성, 1926)을 중심에 뒀다. 이들은 전시동원기에도 친일로 변절한 사례가 거의 없이 은둔·잠적하거나 체포·수감되었다.

<신여성…>은 이런 사회주의 계열 여성들의 삶을 복원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성과 사랑에서도 이들은 급진주의자들 못지않게 자유로이 여러 명과 연애했으며, 동거 또는 결혼했다. ‘여성 동지’들의 성과 사랑은 당시 사회운동계의 크나큰 관심사였다. 여성의 성 해방, 결혼 및 이혼의 자유, 정조와 순결성에 대한 부정, 여성의 경제적 독립 같은 쟁점이 남녀 불문 화제로 떠올랐다. <삼천리>(1930년 11월호)는 특집기사로 ‘남편의 재옥·망명 중 처의 수절 문제’를 다뤘고,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허정숙의 두번째 연인 송봉우가 ‘정조를 절대 사수하라!’라는 글을 썼다. 정통 “맑스 걸, 레닌 레이디”로 일컬어진 주세죽은 한 남자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리고 박헌영, 김단야를 오가는 ‘붉은 연애’를 했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여러 여자와 결혼한 ‘남성 동지’의 정조를 손가락질하는 남성 지식인들은 없었다.

사회주의 여성들은 성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주장하고 실천했지만 공론화하지 않고 일종의 ‘타협’을 했다. 예컨대 순결성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기 조금 거북”(정칠성)하다고 답하는 식이다. 그러나 그 덕에 사회주의 여성들은 나혜석 같은 급진주의 여성들처럼 인격모독을 당하지 않아도 됐다. 좌절과 타협은 신여성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지은이 김경일 교수는 미국에서 보낸 이메일 답변에서 “1920년대 근대 식민지 체제에서 발현된 ‘여성’의 표지가 어떠한 방식으로 각자에게 작동했는지, 여성 자신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행했는지 제시해보려 했다”고 밝혔다. 역사사회학 전공자로서 그는 노동자, 여성, 빈민, 이민자 등 배제된 범주들에 관심을 가지며 동아시아 근대 문제와 신여성, 1970~80년대 여성 노동자를 연구해왔다. ‘남성/자본’의 이중지배와 이에 맞선 개인들의 투쟁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김 교수의 또 다른 후속작을 기대해봄 직하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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