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지음/문예중앙·1만3000원 이순원의 소설 <삿포로의 여인>을 읽다 보면 어쩐지 그의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중편 ‘은비령’이 떠오른다. 설악산 한계령 허리께 가상의 고개 은비령을 무대로 펼쳐진 사랑 이야기가 ‘은비령’이었다면, <삿포로의 여인>은 대관령이라는 실제 고개를 배경 삼아 젊은 시절의 풋풋한 사랑을 돌이킨다. “그때 거짓말처럼 하늘에서 별똥별 하나가 마당가 화덕에 떨어지듯 긴 빗금을 그으며 그의 눈 속으로 떨어졌다”는 소설 후반부 문장은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500만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는 ‘은비령’ 말미의 메아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야기인즉 요약하자면 단순하다.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스물서너살 시절 두해를 대관령 구판장을 관리하며 보낸 대학 휴학생 ‘주호’와 건너편 옷 수선집에서 일하던 소녀 ‘연희’가 사랑-이라기보다는 연민과 우애를 나누었던 20여년 전의 날들을 어떤 계기에 의해 새삼 현재로 소환한다는 것.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일본인 어머니는 고향 삿포로로 돌아간 뒤 혼자 남다시피 한 연희는 상처 입은 어린 새처럼 보는 이의 연민을 자아냈고, 마침 가까이 있던 주호는 인간적 도리로서 그런 연희를 보살폈던 터다. “많은 부분 연희 처지에 대한 연민이었을 테지만, 때로는 마음이 함께 어려져 같은 시기에 같은 시련을 당하고 있는 어린 연인처럼 여겼던 마음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호는 이제 와서야 생각하는데, 서투른 대로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스무해 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다는 회한의 정조가 소설을 지배한다. 스물다섯살 사내와 열여덟살 소녀가 마음을 담은 포옹을 했으면서도 입맞춤 정도의 ‘진도’도 더 나가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회한…. 20년 전 편지에 대한 답장을 뒤늦게 보내면서 끊겼던 관계는 다시 이어질 참인데, 소설 말미의 급작스러운 상황 전개는 그렇듯 유예된 해피엔딩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낭만적이다 못해 ‘통속’의 혐의마저 보이는 설정인데, 이야기에 빠져들어 읽다 보면 그런 식의 비평적 거리 두기가 힘들어진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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