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한국 문학의 사이코패스’ 정유정이 돌아왔다!

등록 2016-05-12 20:33수정 2016-05-13 11:23

사이코패스를 주인공 삼은 소설 <종의 기원>의 작가 정유정. “우리가 평소에 사이코패스를 접할 기회는 드물잖아요? 소설을 통해 간접 경험하면 일종의 백신효과도 거둘 수 있다고 봅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사이코패스를 주인공 삼은 소설 <종의 기원>의 작가 정유정. “우리가 평소에 사이코패스를 접할 기회는 드물잖아요? 소설을 통해 간접 경험하면 일종의 백신효과도 거둘 수 있다고 봅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7년의 밤’ ‘28’ 소설가 정유정
3년 만에 신작 ‘종의 기원’ 출간

사이코패스 주인공 삼은 스릴러
‘악’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려

“본격이니 장르니 구분 의미 없어
나는 재밌는 이야기 쓰는 사람”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은행나무·1만3000원

정유정이 돌아왔다.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28>처럼 서사성 강한 이야기로 독자를 매료시켜 온 정유정이 <28> 이후 3년 만에 신작 <종의 기원>을 내놓았다. 13일 정식 출간되는 이 책은 예약판매만으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주간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오르는 등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출판사 은행나무는 예약 독자 대상 양장본 5천부를 포함해 초판을 5만부 찍기로 했다.

<종의 기원>은 반사회성 성격 장애 사이코패스의 최고 단계인 프레데터(포식자) 유진을 일인칭 주인공 삼은 소설이다. 스물여섯살 건장한 청년 유진은 강렬한 피냄새에 잠에서 깬다. 정신을 차려 보니 흥건한 핏구덩이 속에 어머니가 숨져 있고 제 옷과 온몸 역시 피로 뒤발되어 있다. 스스로 ‘개병’이라 표현하는 발작 증세를 겪는 그는 의사인 이모가 처방해 준 약을 며칠째 끊은 참이었고, 그런 상태에서 찾아오는 에너지 과잉을 주체하지 못해 간밤에 몰래 외출했다 돌아온 터였다. 어머니의 비명과 낯선 남자의 어눌한 노랫소리가 흐릿한 기억을 비집고 들어오지만, 그것들이 어머니의 죽음 및 제 몸의 피칠갑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당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유진은 끊기고 지워진 기억들을 하나씩 되살려 가면서 사건의 진상과 자신의 실체를 확인해 간다. 그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16년 전 사고로 죽은 형과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이 드러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으려는 이모와 어머니의 양자이자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이기도 한 해진이 또 다른 범죄에 희생된다….

“소설가로서 제가 가장 관심을 지니는 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인간 본성에는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는데, 저는 밝음보다는 어두움 속에 도사린 것을 끄집어내기를 좋아합니다. 사이코패스도 우리 안의 어두운 본성 중 하나라고 봐요. 보통 사람들이 평소에 사이코패스와 관련한 경험을 하기는 쉽지 않죠. 그것을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해 본다면 인간과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11일 저녁 서울 서교동 한 카페에서 만난 정유정은 “이런 소설을 독자가 불편해할까 봐 두렵다”면서도 “소설은 궁금증과 물음표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말로 소설 속 악의 탐구를 옹호했다.

“내가 칼을 쥔 게 아니라 칼이 내 손을 거머쥐고 여자 안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저항이 용납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장력이었다.” “복기하고, 내려다보고, 상상할 때마다 기분 좋은 오한이 밀려왔다.”

유진의 범행과 범행 후 심정을 묘사하는 소설 속 문장들에서 확인되는 것은 ‘정상인’의 윤리 및 심리로 그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정신과 의사인 이모는 어린 시절 유진을 검사한 뒤 “(유진이)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도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고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마다하지 않는 ‘순수 악인’이 이렇게 해서 탄생하거니와, 소설 제목은 그런 취지를 담았다.

사실 사이코패스가 순전히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신의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점을 반영하듯 유진의 병증과 범행에는 선천적 요인 못지않게 후천적 환경 역시 큰 몫을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특히 유진의 발병과 그에 따른 사고를 우려한 엄마와 이모는 유진에게 독한 약을 처방하며 그를 극심한 감시 아래 둔다. “내 인생은 두 여자가 깔고 앉은 방석이나 다를 바 없었다”고 유진이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심지어는 그가 저지르는 악행조차 어느 정도는 그에 대한 저항이자 ‘자구책’으로까지 이해될 법하다.

“꿈속에선 마음먹은 일들이 모두 일어나고, 욕망의 밑바닥에선 상상 이상의 일들이 벌어진다. 그게 보통의 인간이며 나 역시 그 범주 안에 있었다.”

프로이트를 떠오르게 하는 유진의 상념은 그가 단지 별종이 아니라 ‘내 안의 또 다른 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악에 대한 탐구는 등단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서부터 제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악을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고 대결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악인을 주인공 삼아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고자 했어요. 소설을 쓰는 동안만큼은 작가 자신이 유진이 되고자 노력했지요. 사이코패스를 미화한다는 말을 듣지 않을까 걱정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여전히 기존의 도덕과 교육, 윤리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나 반성도 하면서 썼습니다.”

작가 정유정이 직접 스케치한 소설 무대 군도신도시 지도. 정유정은 소설을 쓸 때 배경과 장면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은행나무 제공
작가 정유정이 직접 스케치한 소설 무대 군도신도시 지도. 정유정은 소설을 쓸 때 배경과 장면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은행나무 제공

피가 낭자하고 비명이 메아리치는 이 잔인한 소설에서도 유독 살인범 유진이 해진에게 흠씬 얻어맞는 장면을 쓸 때 슬퍼서 울었다는 작가의 말은 그가 주인공에게 얼마나 감정이입을 했는지 알게 한다. “어머니가 하염없는 두려움을 내 핏속에 쏟아넣는 사람이라면, 해진은 내 심장에 노을 같은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네 편이라고 말해주는 존재였다”는 대목은 그 폭행 장면이 작가의 누선을 자극한 또 다른 까닭을 짐작하게 한다.

유진은 어머니가 남긴 일기 형식 메모를 통해 자신의 정체와 잊었던 과거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단서와 사실들이 하나씩 제시되면서 조각그림 퍼즐을 맞추어 가는 재미가 쑬쑬하다. 사실 확인의 결정적 장면에 훼방꾼을 등장시킴으로써 진실의 순간을 유예시키는 독자와의 ‘밀당’도 무르익은 느낌이다. 그러나 악인 자신을 일인칭 주인공 삼은 서술 방식의 특성상 사건의 진상과 범인을 추리하며 대결 결과에 땀을 쥐는 식의 재미는 전작들보다 덜한 편이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추리가 아니라 스릴러예요. 스릴러는 생존 게임과 같죠. 극단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런 선택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는 게 작가로서 제 관심사입니다.”

2000년대 한국 문단에서 정유정의 등장은 이른바 본격문학 중심 구조에 날카로운 충격과 균열을 가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는 신춘문예와 문예지 중심으로 돌아가는 기존 문단과 동떨어진 자리에서, 비평가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독자와 직접 만나는 방식으로 자기만의 문학을 해 왔다. 여성 작가에게 흔히 기대하는 여린 감수성을 마다하고 여전사 ‘아마조네스’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힘있고 독한 이야기를 그는 즐겨 들려주었다.

“장르문학 또는 본격문학 식의 말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에요. 재미있고 의미도 있으며 기왕이면 강렬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게 어떤 장르냐 하는 질문은 저에게 의미가 없어요.”

당당하고 씩씩한 발언이다. 혈연과 과거사를 떨쳐 버리고 ‘순수 악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소설 에필로그 장면의 주인공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과연 정유정은 한국문학의 허위의식과 불건강한 기득권을 교란시키는 ‘문학적 사이코패스’라 할 만하지 않겠는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