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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생존배낭의 필수품, 인간의 선의 그리고 이야기

등록 2016-05-26 20:29수정 2016-05-27 09:30

세번째 소설집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를 낸 작가 윤고은. “수록된 작품 여덟을 보니 흡사 지나가버린 애인 여덟명이 한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세번째 소설집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를 낸 작가 윤고은. “수록된 작품 여덟을 보니 흡사 지나가버린 애인 여덟명이 한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윤고은 소설집 ‘늙은 차와…’
현실과 상상력의 협력과 길항
문학사적 감각과 ‘리믹스’도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윤고은 지음/한겨레출판·1만3000원

작가 윤고은의 특징이라면 톡톡 튀는 상상력을 우선 들 수 있다. 하늘의 달이 늘어나는 상황을 그린 2008년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무중력 증후군>, 재난이 벌어졌거나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다는 설정을 담은 두번째 장편 <밤의 여행자들>, 그리고 두 소설집 <1인용 식탁>과 <알로하>에서도 윤고은 특유의 발랄한 상상력은 한결같이 독자를 매료시켰다. 현실에서 빚어지되 현실의 중력을 가볍게 뛰어넘곤 하는 그의 이야기들은 한국 소설의 영토와 부피를 한껏 키웠다.

여덟 단편을 묶은 윤고은의 세번째 소설집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역시 현실과 상상력의 접점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엑스레이 공장에서 불량품으로 태어난 와이레이(Y-ray)가 사회 구성원 일부를 ‘열외’로 낙인찍는 구실을 하게 되는 ‘Y-ray’, 미술 작가에게 6개월 입주 기회를 주고 거기서 작업한 신작을 단 한번 전시한 뒤 불에 태워 없애 버리는 예술가 레지던시를 상정한 ‘불타는 작품’, 그리고 1930년대 작가 박태원이 21세기 서울에 나타나 자신의 소설 무대 답사객을 안내한다는 ‘다옥정 7번지’ 등은 상상력이 좀 더 승한 쪽이다.

‘진짜’ 구보가 ‘가짜’ 구보 차림을 하고 자신이 쓴 소설 배경을 안내하는 ‘다옥정 7번지’의 상황은 희극적이지만, 그것은 독창성이 불가능해지고 복제와 짜깁기가 난무하는 시대에 소설을 써야 하는 작가의 곤경을 상징하는 장치일 수도 있다. 역시 이 소설집에 수록된 ‘전설적인 존재’라는 단편에서 작가는 이렇게 쓰지 않았겠는가.

“모든 것이 복제된 시대, 내 경험도 네 경험도 뒤섞여 출처가 어디였는지조차 불분명한 시대, 이 시대에 고유한 것이 존재할까.”

그런 복제와 혼합의 시대에 어울리는 글쓰기가 리믹스(remix)라는 듯, ‘다옥정 7번지’에서 윤고은은 박태원과 자신의 문장을 교묘하게 뒤섞는다. 아래 인용에서 작은따옴표 안에 든 것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가져온 부분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에 피로한 것같이’ 느꼈습니다.”

상상의 자유를 한껏 구가한 이 작품들 맞은편에 현실에 좀 더 굳게 뿌리내린 단편들이 있다. 표제작과 ‘된장이 된’, ‘오두막’ 같은 것들이다. ‘된장이 된’은 빌려준 돈 1000만원 대신 된장 50킬로그램을 받아 온 아버지의 이야기.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주요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착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채무자를 위해 탄원서를 써주는가 하면 돈을 받으러 갔다가 오히려 채무자 아들의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고 온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 대신 독한 마음을 먹고 빚을 독촉하러 갔다가 채무자의 반지하방 앞에서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 딸, 그리고 주인공 부녀의 의뢰로 떼인 돈을 받아 주려다가 실패하고 수수료 대신 아버지가 주는 된장을 받고 물러난 채권추심꾼 ‘조’ 역시 이 각박한 세태에 어울리지 않는 선의의 인간들이다.

‘오두막’은 결국 살인으로까지 이어진 성폭행 현장을 목격하고도 모른 체했다는 죄책감으로 헤어지고 만 연인의 이야기. 태양광을 전공한 주인공 남자가 “인적 드문 곳에 등불을 심겠다는 어떤 방향성”으로 결국 사건 현장이었던 제주에 정착해 가로등 세우는 일을 하는 결말이 인상적이다.

표제작은 처음 만난 처지에 시드니 북쪽에서 오스트레일리아 한가운데 울룰루까지 기묘한 자동차 여행을 하게 된 남녀의 이야기다. 극한 상황에 놓인 사람의 생존을 돕도록 꾸려진 생존배낭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한국인 여주인공과 원주민 피를 받은 현지인 남자는 길고 단조로운 여정과 낯설고 위험한 밤을 이야기로 메꾼다. “이야기는 우리가 이 길고 험한 밤을 멈춘 채 통과하는 한 방법이었다”고 작가가 쓸 때, 그것은 이야기로서 문학의 존재 이유에 대한 멋진 정의처럼 들린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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