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권여선 지음/창비·1만2000원
“술자리는 내 뜻대로 시작되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가다 결국은 결핍을 남기고 끝난다. 술로 인한 희로애락의 도돌이표는 글을 쓸 때의 그것과 닮았다.”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말미에 붙인 ‘작가의 말’에서 권여선(51·사진)은 이렇게 썼다. 술과 술자리를 즐기는 작가를 아는 이라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일 대목이다. 일곱 단편이 묶인 이 책에 ‘안녕 주정뱅이’라는 제목을 단 작품은 없다. 단편 ‘역광’에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라는 대사가 나올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비롯해 거의 모든 수록작에 작가만큼이나 술을 즐기는 인물들이 등장하니, 그런 소설들을 한데 묶는 제목으로는 그럴듯하다 싶다.
소설집 맨 앞에 실린 ‘봄밤’의 주인공 영경은 극단적이다. 피차 한번씩 결혼에 실패하고 마흔셋 늦은 나이에 만나 12년을 함께한 수환과 영경은 나란히 지방 요양원에 입원했다. 수환은 류머티즘 관절염, 영경은 중증 알코올중독과 간경화, 심각한 영양실조. “요양원 직원들은 유난히 의가 좋고 사랑스러운 대신 화약처럼 아슬아슬한 그들 부부를 ‘알류 커플’이라 불렀다.” 요양원 직원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그곳에 들어와서도 끊지 못하는 영경의 술. 영경은 주기적으로 외출증을 끊어 밖으로 나가서는 지칠 때까지 술을 마시다 돌아오곤 한다. 그리고 그런 영경의 의사를 수환은 최대한 존중한다. 그런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은 운명적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이지만 거기에는 또한 비극 특유의 숭고미가 깃든다.
이어지는 ‘삼인행’은 이혼을 앞둔 부부와 친구의 기묘한 여행을 그리는데, 여기서도 술은 상황과 관계의 위태로움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구실을 한다. 술꾼인 신인 소설가를 주인공 삼은 ‘역광’은 물론, 시이모와 조카며느리가 대작하는 ‘이모’, 14년 만에 만난 여고 친구들의 요란한 술자리가 남긴 치명상을 다룬 ‘실내화 한켤레’, 애인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그 누나와 술을 마시면서 실연의 감추어진 비밀을 확인하게 되는 ‘카메라’ 역시 술을 매개로 삼아 인생의 희로애락애오욕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두루 통한다. 우연과 필연, 과오와 재앙 사이의 함수관계 역시 술을 매개로 풀려나온다.
술자리의 악의 없는 농담처럼 책 제목을 정하긴 했어도, 권여선의 다섯번째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 실린 작품들은 올해로 등단 20년을 맞은 이 작가의 필치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음을 확인시킨다. 별생각 없이 툭툭 던지는 듯한 문장들에 삶의 비의가 얹혀 있고, 인간관계의 미묘하고 섬세한 결을 포착하는 시선은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다.
최재봉 기자, 사진 창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