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빈 배처럼 텅 비어, 그대 어디로 가시려는가

등록 2016-06-23 22:29수정 2016-06-23 22:33

최승자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압도적인 죽음과 소멸 예감 속
삶과 시를 향한 안간힘 보여

빈 배처럼 텅 비어
최승자 지음/문학과지성사·8000원

최승자(64)의 여덟 번째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는 죽음과 소멸의 예감으로 가득하다.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어언 수천 년//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빈 배처럼 텅 비어’ 전문)

“그리하여 문득 시간이 끝난 뒤/ 허공을 불어가는 고요한 바람 소리/ 붙박이 별도 떠돌이 별도 사라진 뒤// 그리하여 모든 시간이 끝난 뒤에”(‘그리하여 문득’ 전문)

시집 어느 페이지를 펼쳐 봐도 죽음과 소멸 또는 종말의 이미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 자신에게 가장 친숙한 것이 죽음이라는 듯, 시인은 지치지도 않고 죽음을 노래한다. 시집 맨 앞에 실린 표제시는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피어나는 꽃 피면서 지고”(‘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나 “살았능가 죽었능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대답하라는 소리”(‘살았능가 살았능가’) 같은 죽음의 예감 또는 부름의 시편들로 이어진다.

물론 최승자는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81)에서부터 <내 무덤, 푸르고>(1993)에 이르는 초기 시들에서도 유난하리만치 죽음에 친연성을 보였다. 그러나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일찍이 나는’) 또는 “그게 우리의 삶이라는 거지. 죽음은 시시한 것이야./ 왜냐하면 우린 이미 죽어 있으니까.”(‘서역 만리’) 같은 초기 시들에서 죽음이 위악적이며 반어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달관까지는 아니더라도 모종의 체념적 태도가 짚인다. 이런 시들을 보라.

“하늘의 바람을 불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누군가 운명을 쥐고 누군가 운명을 건네받는다”(‘따듯한 풀빵 같은’ 부분)

“하늘이 운다/ 구름이 운다/ 일생이 불려가고 있다// 어느 날 나는/ 마지막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어느 날 나는’ 전문)

<물 위에 씌어진> 이후 5년 만에 여덟 번째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를 낸 최승자 시인. “한판 넋두리를  쏟아놓은 기분”(‘시인의 말’)이라고 썼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물 위에 씌어진> 이후 5년 만에 여덟 번째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를 낸 최승자 시인. “한판 넋두리를 쏟아놓은 기분”(‘시인의 말’)이라고 썼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이 시집에는 허공을 불어가는 바람의 이미지가 자주 보이는데, 여기서 바람은 소멸과 종말의 운명을 실어 나른다. 그리고 그 바람이 지나가는 허공은 존재의 숨은 본질인 허(虛) 또는 “텅 빔”을 상징한다. “존재는 虛다”(‘존재는’)라든가 “장자가 無(무)라면 노자는 虛다”(‘죽은 시계’) 같은 구절은 존재론을 담은 선언들로 다가온다.

이렇듯 죽음에 들린 시인에게도 삶을 향한 의지와 지향이 아주 없지는 않다. “내일 햇님이 떠오르기 전에/ 잃어버린 내 그림자를/ 다시 붙여놓아야겠다”(‘또 하루가 지나가고’)라는 시에서, 분리되고 실종된 그림자를 되찾겠다는 의지는 얼마나 적극적인가. 적어도 “나 여기 있으면/ 어느 그림자가/ 거기 어디서/ 술을 마시고 있겠지”(‘나 여기 있으면’)에서 보이는 분열과 체념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르지 않겠는가. 그뿐이 아니다. 죽음에서 벗어나 삶 쪽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한결 또렷하게 드러낸 시들도 있다.

“죽음은 한때 나의 추운 그늘이었거니/ 오늘 햇빛 쨍한 날/ 바깥 침상 위에 목침 베고 누워/ 푸른 하늘 환히 바라본다”(‘죽음은 한때’ 전문)

“나는 육십 년간 죽어 있는 세계만 바라보았다/ 이젠 살아 있는 세계를 보고 싶다/ 사랑 찌개백반인 삶이여 세계여”(‘나는 육십 년간’ 부분)

압도적인 죽음에의 경도 속 이런 드문 삶에의 지향이 시인에게 어느 정도 비중을 지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고독을 자양분 삼아 시라는 생존 증명서를 작성해 온 시인의 작업을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에게 시가 버팀목이었다면, 최승자의 시를 버팀목 삼아 세월을 버텨 온 독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생존 증명서는 시였고/ 시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나의 생존 증명서는’ 전문)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